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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 신앙교리부]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의 협력과 관련된 마리아의 일부 호칭에 관한 교리 공지
  • 작성자 홍보전산
  • 작성일 2026-02-05 오전 9:32:21
  • 조   회 19

교황청 신앙교리부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의 협력과 관련된 마리아의 일부 호칭에 관한 교리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

 

 

소개

 

이 공지는 마리아 신심과 마리아의 특정 호칭들에 관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최근 수십 년 동안 성좌, 특히 교황청 신앙교리부에 제기된 수많은 문의와 제안에 대한 답변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최근 교황님들의 관심사가 되었고, 지난 30년 동안 신앙교리부의 다양한 연구 분야에서, 예를 들어 여러 학회와 정례 회의에서 거듭 다루어졌다. 이로써, 본 신앙교리부는 풍성하고 다양한 자료를 모을 수 있었고 이 공지와 더불어 그동안 무르익은 성찰을 제시한다. 

 

이 글은 마리아를 지칭하는 특정 호칭들과 표현들이 어떤 의미에서 허용되거나 허용될 수 없는지를 명확히 밝히는 동시에, 유일한 중개자이시며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비추어 마리아께서 신앙인들과 이루는 관계에서 차지하시는 위치를 명시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의 올바른 토대를 더욱 깊이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가톨릭 정체성에 대한 깊은 충실함을 수반하는 동시에 특별한 교회 일치 노력도 요구한다. 

 

이 공지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신자들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이다. 이 주제는 이 문서에서 매번 새로운 숙고 사항을 통하여 나선형으로 풍요롭게 완성되어 나가는 진술들을 거듭 다룸으로써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이 문서는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된 마리아 신심을 교회의 보화로 제시한다. 이는 마리아 안에서 피신처, 힘, 자애, 희망을 찾는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신심을 성찰하여 바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신심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아름다움을 인식하며 증진하려는 것이다. 이 마리아 신심은 성령께서 믿는 이들 안에 기꺼이 북돋워 주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라는 복음적 태도의 신비 교육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은 “또한 마리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애정과 사랑을 발견한다. 그들은 마리아 안에서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그런데 대중 신심으로서의 동일한 특징을 공유하지 않는 일부 마리아 묵상 모임, 출판물, 새로운 신심 형태, 그리고 심지어 마리아 교의 선포를 요청하는 움직임들도 존재한다. 오히려 이러한 활동들은 궁극적으로 특별한 교의적 발전을 제안하고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자신을 강력히 드러내며 일반 신자들 사이에 자주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따금 이러한 시도들은 과거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던 표현들을 재해석하는 것과 연관되기도 한다. 이 문서는 이러한 제안들을 검토하여, 일부 제안은 복음의 영감을 받은 진정한 마리아 신심에 부합하고, 또 다른 일부 제안은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의 조화를 올바로 묵상하는 데에 무익하기에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나아가 이 공지는 진정한 마리아 신심이 교회의 풍요로운 성전(聖傳)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여러 구절에서 폭넓은 성서적 전개를 제공한다. 이 문서에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성경 언급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 최근 교황들의 글과 함께 제시된다. 따라서 이 공지는 한계를 두기보다는 오히려 마리아의 사랑과 그분의 모성적 전구에 대한 신뢰에 함께하고 이를 지지하고자 한다.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

 

 

도입

 

1.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 그리스도인들은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어머니를 사랑과 공경을 담아 바라본다. 은총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게 해 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마리아께서는 우리 인간을 변모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가장 완전하게 표현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한 사람 안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의 여성적 현현이시다. 이러한 아름다움 앞에서 그리고 사랑에 이끌려, 역사 전체에 걸쳐 많은 신자가 그리스도 옆에 계시는 마리아의 특별한 위치를 칭송하며 성모님을 말할 때 가장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하고자 노력해 왔다.

 

2. 최근에 본 신앙교리부는 「초자연적 현상의 식별 절차에 관한 규범」을 발표하였다. 동정 마리아를 지칭하는 특정 호칭들과 표현들이 그러한 현상들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런데 –이미 교부들의 저술에도 일부 등장하는- 이러한 호칭들이 언제나 정확하게 사용되는 것은 아니고, 이따금 그 의미가 바뀌거나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용어상의 문제 외에도, 일부 호칭들은 내용상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한다. 이러한 호칭들이 그리스도론과 교회론과 인간학의 차원에서 심각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흔히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3. 이러한 호칭들을 동정 마리아께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할 때에 쟁점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참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곧, “구원 계획에서 마리아의 독특한 협력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이 문서는 이에 관하여 포괄적으로나 완전하게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비들 안에서 정립되어야 하는 균형, 곧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와, 구원 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 사이에 필요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며, 이러한 협력이 다양한 마리아 호칭들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 주고자 한다.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의 협력

 

4. 구원 사업에서 마리아의 협력에 대한 접근은 전통적으로 이중의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 삶에서 특히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성취하신 객관적 구속에 대한 마리아의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구원받은 이들에게 현재 마리아께서 미치는 영향력이다. 실제로 이 두 관점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따로 고려될 수 없다.

 

5.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대한 마리아의 참여는 성경에 입증되어 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 사건을 구약에서는 약속으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완성으로 제시한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마리아를 미리 볼 수 있는데, 마리아께서는 뱀을 물리치는 그 결정적인 승리에 동참하는 여인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골고타에서 마리아를 “여인”(요한 19,26)이라 부르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카나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여인”(요한 2,4)이라 부르시며 십자가의 ‘때’에 당신과 함께하시는 마리아와 그분의 역할을 언급하신다. 

 

6. 그 ‘때’에, 마리아의 협력은 마리아께서 주님 탄생 예고에서 하신 “예”라는 말씀을 되풀이하시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 거룩한 순간에,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여인”(요한 19,26)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그분을 “어머니”(요한 19,27)로 소개하시는 장면으로 나아간다. 이에 응답하여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고 설명할 때, 이 복음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라는 의미의 동사(lambanō, 람바노)를 사용한다(요한 1,11-12; 5,43; 13,20 참조). 넷째 복음서는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빛이신 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요한 1,11) 않았다고 전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대표하여 마리아 곁에 서 있던 그 제자는 믿음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어머니이신 마리아께 우리를 맡기신 다음에 비로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셨다. 완성을 암시하는 이 장엄한 말씀은 이 사건에 대한 어떠한 피상적인 해석도 막아 준다. 우리에 대한 마리아의 모성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로 성취된 하느님 계획의 일부이다. 마찬가지로 요한 묵시록은 “여인”(묵시 12,1)을 메시아의 어머니(묵시 12,5 참조)이자 “그 여인의 나머지 후손들”(묵시 12,17)의 어머니로 제시한다. 

 

7. 나자렛의 마리아께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유년기 사건들의 “탁월하신 증인”으로 여겨지실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루카 1─2장; 마태 1─2장 참조).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서 머리말에서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린다.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처음부터 목격자[가] ……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루카 1,1-2). 따라서 루카 복음사가 자신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보[기로]”(루카 1,3) 결심하였다고 전한다. 이 목격자들 가운데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잉태, 탄생, 유년기의 직접적인 주역으로서 단연 돋보이신다. 수난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요한 19,25) 마리아께서 서 계셨기 때문이다. 오순절 이전에도 마찬가지로 사도들은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 함께 …… 기도에 전념”(사도 1,14)하고 있었다.

 

8. 루카 복음서는 마리아를 구원의 기쁨을 받아 전하는 새로운 ‘시온의 딸’로 제시한다. 루카는 메시아적 기쁨을 예고한 예언적 약속들을 모아 전한다(스바 3,14-17; 즈카 9,9 참조). 세례자 요한을 기쁨으로 뛰놀게 한(루카 1,41 참조) 그 약속들이 마리아 안에서 성취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신을 드러내며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하고 말한다. 엘리사벳은 “내 주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말하지 않고 바로 그분의 어머니를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명과 마리아의 사명이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가리켜 준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이야기한다(루카 1,41 참조). 마리아를 향한 엘리사벳의 이러한 자세는 믿음의 본보기로 제시된다. 그러고 나서 엘리사벳은 성령께 이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놀랍게도, 성령의 활동 아래에서는 엘리사벳이 예수님을 ‘복되신 분’이라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엘리사벳은 메시아적 기쁨을 느낀 이때에 두 분께서 내밀히 하나 되어 계심을 인식하며, 예수님의 어머니 또한 ‘복되신 분’이라 부른다. 마리아께서는 여기에서 탁월하게 복되신 분으로 드러나신다. “행복하십니다, …… 믿으신 분!”(루카 1,45) “내 마음이 …… 기뻐 뛰니”(루카 1,47).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 루카 복음에서는 이러한 행복을, 마음의 상태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루카 6,23 참조) 작은 이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메시아 약속의 완성으로 본다는 점(루카 6,20-22 참조)을 유념할 때, 이러한 설명이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된다.

 

9. 그리스도교 초기에 이러한 주제들의 신학적 발전과 관련하여, 교부들은 주로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otokos)이시고, 평생 동정(에이파르테노스, Aeiparthenos)이시며, 온 생애에 걸쳐 죄 없으신 완덕을 지닌 분(파나기아, Panagia)이시라는 측면과 새 하와로서 마리아의 역할에 관심을 두고, 강생의 신비라는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마리아의 참여를 성찰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시도록, 가브리엘 대천사의 예고에 대한 마리아의 “예”는(루카 1,26-37 참조), 인간 존재가 신화(divinization)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이러한 까닭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동정 마리아를 그리스도 구원의 ‘협력자’로 부르며, 마리아께서 그리스도 옆에서 하시는 활동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종속되어 계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믿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 태어나도록” 마리아께서 그리스도께 협조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10. 제일천년기 동안 교회 안에서 동정 마리아에 대한 성찰은 전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었다. 동방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들의 크고 풍부한 다양성은 성경, 공의회들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반향하고자 하였다. ‘신앙의 법칙’(lex credendi)으로 발전한 ‘기도의 법칙’(lex orandi)은 찬미가, 이콘 도상학, 대중 신심을 통하여 동방 교회의 마리아론을 형성하였다. 예를 들어, 5세기부터 마리아 축일들이 동방에서 처음 제정되었고, 이후 7세기부터 서방으로 퍼져나갔다. 동방 교회들은 감사 기도와 성찬 전례 안에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동방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전례 전통에 존재하는 법정 시간경에서 사용하는 찬미가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어머니의 구원 사업 참여를 기념하였다. 그들의 찬미가는 성경 우의(biblical allegories)(* 역자 주: 성경이 말하는 실재와 사건들을 성경 문장의 자구적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와 그분 강생의 신비를 드러내는 예표로 이해하는 해석 방식으로서, 교회의 전통에서 특히 풍성하게 드러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우의적 의미를 통하여 성경의 사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115.117항 참조).)와 더불어 마리아께 바치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이를 통하여 강생의 근본 신비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 구원을 위한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찬미가들은 시적 상징으로 가득 찬 언어를 사용하여, 마리아와 같은 본성을 지니는 이들이 전능하신 분께서 마리아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묵상하며 느끼는 경이로움과 경탄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11. 초기 세계 공의회들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교의를 정립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 교의가 선포되었다. 동방 그리스도교는 적어도 에페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를 받아들인 교회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초기 공의회들에서 규정된 교의들을 언제나 지지해 왔다. 또한 동방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유년기와 죽음을 언급하는, 마리아에 대한 대중적인 이야기와 전설을 전례와 찬미가와 이콘 도상학의 전통들 안에 받아들였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오로지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의 서정적인 시적 심상에 목소리를 부여함으로써 하느님 백성의 신심을 키우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공경은 성모 마리아와 사람이 되신 말씀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이콘 도상학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에페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와 연관된 이들 교회의 전통 이콘들이 대부분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묘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신 아드님이신 아기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 주시고 당신 품에 안고 계신 예수님 앞에서 인류를 위하여 전구하시는 동정 성모님을 관상하고자 이러한 이콘들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동방의 마리아 이콘 도상학은 초기 공의회들과 교부들의 신학을 시각적으로 다채롭게 일깨워 주는 첫 선포(kerygma, 케리그마)로서, 동정 마리아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호칭들을 시각적으로 옮기고자 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러한 이콘들은 교회의 전례와 찬미가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 옆에 자리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강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들어가게 된 분이시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흠숭받으시는 표상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는 동정 성모님, 곧 테오토코스이시다. 이와 동시에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손으로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시는 ‘길의 인도자’(Hodegetria, 호데게트리아)이시기도 하다.

 

12. 12세기부터 서방 신학은 동정 성모님을 골고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구속 신비와 연결하고 칼에 대한 시메온의 예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관시키는 관계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십자가 아래에 계신 마리아의 모습은 모성애로 가득 찬 그리스도교적 용기의 표징으로 여겨졌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에 대한 주해에서 성모 마리아께서 구속 희생에 협력하셨다고 이야기한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벗이었던 베네딕토회의 본네발 수도원장 아르날도(†1159년 이후)가 마리아께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옆에서 골고타 희생 제사에 협력하신 것에 대하여 처음으로 고찰하였다.

 

13. 교회의 교도권은, 구원 사업에서 성모님께서 아드님께 협력했다고 가르쳐 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힌 대로, “거룩한 교부들이 마리아께서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신다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 협력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잉태, 탄생, 죽음, 부활)뿐만 아니라 교회의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14.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는 구속 사업에서 그리스도의 수위성과 유일성을 강조한다. 이 교의는 구원받은 첫 번째 사람이신 마리아께서 당신 자신의 그 어떤 행위에 앞서 그리스도께 구원받으셨고 성령을 통하여 변화되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구원받고 성령을 통하여 변화된 첫 번째 사람이라는 이 특별한 조건에 따라,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원형이자 모범, 본보기가 되시어, 그리스도와 성령께 더욱 열렬하고 깊이 협력하실 수 있다.

 

15. 구원 사업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은 삼위일체적 구조를 띤다. 이 협력이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신]”(루카 1,48) 성부께서 주도하신 일의 결실이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성자의 자기 비움(kenosis, 케노시스)에서 비롯된 것이며(필리 2,7-8 참조), 나자렛의 젊은 여인 마리아의 마음을 준비시키시어 주님 탄생 예고에 응답하게 하시고 전 생애에 걸쳐 아드님과 친교를 나누도록 이끄신 성령께서 베푸신 은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루카 1,28.30 참조).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동정 마리아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고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영원으로부터 마리아를 택하시어 지극히 거룩한 어머니가 되게 하시고, 그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았던 성령의 은사들로 꾸며 주신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예”는 그분의 동의와 협력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어떤 일의 단순한 전제 조건이 아니다. 마리아의 모성은 그저 생물학적이거나 본성상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당신 구원 계획에 따라 뜻하신 도구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에 결합된 “완전히 능동적인” 모성이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여인에게서 태어[난]’(갈라 4,4) 참사람이심을 보증하시는 분”이시고, 니케아 교의가 선포된 이래로 “하느님을 낳으신 하느님의 어머니, 테오토코스”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으신다.

 

구원에서 마리아의 협력을 가리키는 호칭들

 

16. 마리아를 부를 때 사용하는 여러 호칭들(‘자비의 어머니’, ‘가난한 이들의 희망’, ‘신자들의 도움’, ‘영원한 도움의 성모’, ‘변호자’ 등) 가운데에는 ‘공동 구속자’(Co-redemptrix)와 ‘중개자’(Mediatrix)처럼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을 더욱 강조하는 호칭들도 있다.

 

공동 구속자

 

17. ‘공동 구속자’(Co-redemptrix)라는 호칭은 15세기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는 10세기부터 마리아에게 붙여 온 ‘구속자’(Redemptrix, ‘구원자의 어머니’라는 호칭의 축약형)라는 호칭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마리아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하신 역할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이것이 15세기 잘츠부르크의 익명의 찬미가에 처음 등장하는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의 기원이 되었다. ‘구속자’라는 호칭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지속되었지만, 18세기에 이르러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으로 대체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20세기 전반에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마리아의 협력에 관하여 신학적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이 의미하는 바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18. 일부 교황들께서는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으나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시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그 교황들께서는 이 호칭을 두 가지 구체적인 방식으로 제시하셨다. 하나는 (어머니로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가능하게 하셨다는 점에서) 마리아의 신적 모성을 가리키고, 또 하나는 마리아께서 구원의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이루신 일치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의적, 사목적, 교회 일치적 이유로 이 호칭의 사용을 삼갔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마리아를 적어도 일곱 차례에 걸쳐 ‘공동 구속자’라고 언급하시고, 특별히 이 호칭을 우리 고통의 구원적 가치와 연결 지으셨다. 우리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함께 봉헌될 때 구원적 가치를 지니고, 마리아께서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고통에 특히 십자가 아래에서 일치를 이루신 분이다.

 

19. 1996년 2월 21일 수요일에 있었던 회의에서,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마리아를 ‘공동 구속자’ 또는 ‘모든 은총의 중개자’(Mediatrix of All Graces)로 선언하는 교의를 결정해 달라는 운동(Vox Populi Mariae Mediatrici)의 청원을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라칭거 추기경은 개인적인 견해를 담아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 호칭들의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하고, 그 안에 담긴 교리는 아직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믿음에 관하여 규정된 교리는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 곧 성경과 사도 전승으로 전해지는 하느님 계시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에 표현된 교리가 성경과 사도 전승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후 2002년에 라칭거 추기경은 이 호칭 사용에 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였다. “‘공동 구속자’라는 표현은 성경과 교부들이 사용한 언어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 특히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우리에게 알려 준 대로, 모든 것이 그분[그리스도]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마리아도 그분을 통하여 지금의 마리아가 되신 것입니다. ‘공동 구속자’라는 표현은 이러한 기원을 모호하게 할 것입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이 호칭을 사용하자는 제안에 좋은 의도와 가치 있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의도와 가치가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20. 그 당시 라칭거 추기경은 에페소서와 콜로새서를 언급하며, 그 서간들에 나오는 찬미가들의 어휘와 신학적 역동성이 강생하신 아드님의 유일무이한 구원 중심성과 근원을 다른 어떤 중개를 더할 여지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제시한다고 하였다. “온갖 영적인 복”이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1,3) 우리에게 베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녀로 입양되었고(에페 1,5 참조) 그분 안에서 은총을 받았으며(에페 1,6 참조)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 받았[고]”(에페 1,7), 그분의 은총이 “우리에게 넘치도록”(에페 1,8) 베풀어졌다. 또한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다]”(에페 1,11).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고]”(콜로 1,19),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콜로 1,20).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지위에 대한 이러한 찬양은, 모든 피조물을 그분과 이루는 관계에서 분명히 수용적인 위치에 두고, 구원 영역에서 그분께 협력하는 어떤 가능한 형태를 제안할 때에는 언제나 신중하고 경건한 자세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적어도 세 차례에 걸쳐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 사용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시며 다음과 같이 논증하셨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어떤 것도 결코 자신을 위하여 취하시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를 공동 구속자로 내세우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제자라고 당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은 완전하였고 더 이상 아무것도 보탤 필요가 없다. 따라서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호칭도 빼앗으려 하지 않으셨다. …… 성모님께서는 스스로 준(準)구속자 또는 공동 구속자가 되려 하지 않으셨다. 그러지 않으셨다. 구세주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고, 이 호칭은 중복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구속주이시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 구속자는 없다.” “사랑과 순명의 정신으로 봉헌된 십자가의 희생 제사야말로 가장 풍성하고 무한한 보속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효력을 세상 안에서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콜로 1,24 참조), 교회도 마리아도 강생하신 하느님 아드님의 완전하고 더할 나위 없는 구속 사업을 대체하거나 완성하지 못한다.

 

22. 구속 사업에서 그리스도께 종속된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고려할 때, 마리아의 협력을 규정하기 위하여 ‘공동 구속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부적절하다. 이 호칭은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구원 중개를 흐려지게 만들 위험이 있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들이 이루는 조화에 혼란과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어떤 표현이 정확한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반복적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할 때, 이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에 이롭기는커녕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 ‘공동 구속자’라는 표현은 마리아를 구속과 은총의 활동에서 가장 으뜸가는 협력자로 칭송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표현은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성부께 무한한 가치를 지닌 희생 제사를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는 역할을 가릴 위험이 있다. 이는 그분의 어머니께 진정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주님의 종”(루카 1,38)이신 마리아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신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중개자

 

23. 중개라는 개념은 6세기부터 동방 교회 교부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크레타의 안드레아 성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르마노 성인, 다마스쿠스의 요한 성인은 이 호칭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서방에서는 12세기부터 이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되었지만,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인 교리 명제로 정립되었다. 1921년 메헬렌 대교구장 메르시에 추기경은 루뱅 가톨릭 대학교의 학문적 협력과 벨기에 주교, 성직자, 평신도의 지지를 받아 베네딕토 15세 교황에게 마리아의 보편적 중개에 관한 교의 결정을 발표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토 15세 교황께서는 이 요청을 승인하지 않으셨고, 중개자 마리아 축일만을 그 고유 미사와 성무일도와 함께 승인하셨다. 그때부터 1950년까지 이 문제에 관한 신학 연구가 계속 발전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준비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공의회는 교의 선언에 들어가지 않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부여해야 할 위치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광범한 종합을 제시하기로 하였다.

 

24.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에 대한 성경 말씀은 단호하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1티모 2,5-6).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 아드님이시고 몸소 받아들이신 인성과 위격적으로 결합되어 계시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위치를 명확히 밝혀 왔다.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고유한 것이고 여기에서 비롯되는 결과들은 오직 그분께만 합당하게 적용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강생하신 말씀의 역할은 배타적이고 유일무이하다. 계시된 하느님 말씀에 담긴 이러한 명확한 측면을 고려할 때, 마리아께 ‘중개자’라는 호칭을 적용할 때에는 특별한 신중함이 요구된다. 이 호칭을 통하여 마리아의 협력의 범위를 넓히려는 경향에 대응하여, 이 호칭이 지니는 가치와 한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25. 한편으로, 우리는 ‘중개’라는 용어가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흔히 사용되며 단순히 협력, 조력, 전구로 이해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 용어는 마리아에게 반드시 종속적인 의미로 적용되고, 여기에 참하느님이요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에 어떤 효력이나 힘을 더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들어 있지 않다.

 

26.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 인류 가운데 강생하실 수 있도록 참된 중개자 역할을 하셨음이 명백하다. 구세주께서 “여인에게서 태어나[실]”(갈라 4,4) 것이었기 때문이다. 탄생 예고 이야기는 이것이 생물학적 중개만이 아님을 보여 준다. 질문을 하시고(루카 1,29.34 참조), 이어서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루카 1,38) 하시며 확고한 결심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마리아의 능동적 참여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리아의 응답으로 온 인류가 기다려 왔고 성인들이 시적이고 극적으로 표현해 왔던 구원의 문이 열렸다. 마리아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신랑 신부의 필요를 예수님께 전하시고(요한 2,3 참조) 일꾼들에게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따르라고 이르시면서(요한 2,5 참조) 중개 역할을 수행하신다. 

 

27.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중개라는 용어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된다. 때로는 마리아에 대해서도 언급되지만, 그 중개는 명백히 종속적인 방식이다. 실제로 공의회는 마리아에 대하여 다른 용어, 곧 협력이나 모성적 도움에 초점을 맞춘 용어 사용을 더 선호한다. 공의회의 가르침은 “수많은 전구”와 “어머니의 이러한 도우심”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의 관점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두 측면이 함께 그리스도의 행위 안에서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협력의 특수성을 이룬다. 엄밀히 말하자면,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중개 외에 우리는 다른 어떤 은총의 중개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주님이시고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당신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셨고, 구세사의 충만이시며 중심이시라는 진리는 교회 신앙의 변함 없는 요소로 굳게 믿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하고 결코 묻어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 안에서의 마리아

 

28.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중개의 유일성은 ‘포용적’이라는 사실을, 곧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의 완성에서 다양한 형태의 중개를 가능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모로든 하느님의 협력자요 우리 서로의 ‘중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1코린 3,9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신의 지극히 높고 무한한 권능으로, 당신 계획의 성취에 참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당신의 형제자매들을 드높여 주실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확언하였다. “구세주의 유일한 중개도 ……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다양한 협력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참여적 중개의 내용을 더욱 깊이 탐구하여야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의 원리와 언제나 부합하여야 한다.” 참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의 효력을 시간 안에 연장하고 모든 곳에 전하며 마리아께서는 어머니인 교회의 심장부에서 유일무이한 자리에 계신다.

 

29.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 활동에 대한 믿는 이들의 협력을 북돋고 변화시키며 가능하게 하신다는 확신에서 출발할 때, 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한 마리아의 참여가 명백히 드러난다. 이는 그리스도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함 또는 필요 때문이 아니라, 아무 대가를 바라시지 않고 너그러이 우리를 당신 활동의 협력자로 참여시키실 수 있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권능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고 당신 은총에 이끌려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해 주실 때 마침내 그분 권능과 자비의 영광이 드높여진다는 것이다.

 

영광의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는

 

30.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특히 빛을 발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부활하시어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하나 된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능가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는 그들이 믿음을 통하여 영광의 그리스도와 결합한 덕분이다. 초대 교회의 놀라운 확장이라는 예에서 증명되었듯, 부활하신 분께서 당신의 이 일에 당신 교회가 동참하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마르 16,15 참조).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은 줄어들지 않고 더욱더 가시화되어, 믿는 이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당신과 함께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는 권능으로서 드러난다. 

 

31. 교회의 교부들은 요한 복음 7장 37-39절에 대한 주해들을 통하여 이러한 전망을 탁월하게 표현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생수의 강들”은 믿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변화된 믿는 이들 자신이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한 샘이 된다. 오리게네스는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생명의 강들이 흘러나오게 하심으로써 요한 복음 7장 38절에 기록된 당신의 선포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다고 설명하였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우물들, 샘들, 강들을 품고 있고 또 흘러나오게도 할 수 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영원한 생명의 샘이 그대 안에 넘쳐흐르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열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셔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믿는 이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의 다양한 선물을 지체 없이 나눈다면 그의 마음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올 것이다.”

 

32. 참으로 모든 믿는 이가 은총으로 변화되도록 자신을 내맡기게 될수록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협력이 더욱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면, 마리아의 협력은 단연코 고유하고도 숭고한 방식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해야 마땅하다. 마리아께서는 “은총이 가득한 이”(루카 1,28)시며 하느님의 일에 그 어떤 걸림돌도 없게 이렇게 응답하신 분이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께서는 구원과 은총의 창조주를 세상에 낳아 주신 어머니요, 당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고 칼에 꿰찔린 어머니 마음의 아픔을 봉헌하시면서(루카 2,35 참조) 십자가 발치에 결연히 서 계셨던 분이시다(요한 19,25 참조). 그리스도의 강생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까지, 마리아께서는 그 어떤 신자도 도달할 수 없는 유일하고 탁월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계셨다. 

 

33. 이 모든 것은 마리아 스스로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유일한 주 구세주의 영광을 통하여 고유하고도 선취적 방식으로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입으신 덕분이다. 종합하자면, 마리아께서는 하느님 은총의 효력에 대한 찬미의 노래이시고, 그러하기에 그분 아름다움에 대한 어떤 증언도 곧바로 모든 선의 원천이신 성삼위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리아의 비할 데 없는 위대함은 그분께서 받으신 선물과 성령께서 충만히 내리시도록 당신 자신을 기꺼이 맡겨 드리는 신뢰의 마음가짐에 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역할과 병행하는 능동적 역할을 마리아께 부여하려 애쓴다면 그분의 비할 데 없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잃고 마는 것이다. ‘참여적 중개’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역할이 지닌 정확하고 귀중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으나, 만일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의미를 흐려지게 하고 심지어 그 반대의 의미가 되기도 쉽다. 그리스도의 중개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포용적’이고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배타적이고 통교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믿는 이들의 어머니

 

34. 마리아의 경우, 이러한 중개는 모성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그렇게 하셨고, 십자가 아래서도 분명 그렇게 하셨다. 이 사실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이는 그분께서 십자가 사건 때에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 받은 호칭입니다(요한 19,26-27 참조). [이들은] 당신의 자녀들이고 당신께서는 어머니십니다. …… 그분께서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선물을 받으셨고 어머니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며 우리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 의무를 받으셨습니다.”

 

35. ‘어머니’라는 호칭의 근거는 성경과 교부들에 있다. 이 호칭은 교도권에서도 제시되고, 그 내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과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에서 용어 ‘영적 모성’을 사용하기까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육체적 모성에서 비롯된다. 자유 의지와 믿음으로 그 사명을 수락하시어 육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심으로써 마리아께서는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인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낳아 주셨다. 다시 말해, 머리와 지체들로 이루어진 온전한 그리스도(totus Christus)를 낳아 주신 것이다.

 

36. 동정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 강생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까지 당신 아드님의 온 생애에 참여하신 사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대한 그분의 협력에 유일하고도 특별한 특징을 부여하며, 이는 교회가 “신비체의 모든 지체를 위한 마리아의 영적인 모성을 생각할 때, 신뢰 안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릴 때, 변호자이시며 협조자이신 마리아의 전구를 체험할 때” 특히 교회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모성적 측면은 동정녀께서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 그리고 구원 활동의 모든 순간에 대한 그분 협력의 특징이다.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의 사명을 통하여 구세주와 그리고 구원받은 이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다. 마리아께서는 그 구원받은 이들 가운데 첫째 자리에 계신다.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전형(모범)이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 남의 전형(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교회 자체의 요약이시고” 상징이시다. 이러한 모성은 전적인 자기 증여와 신비에 봉사하라는 부르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모성과 온 교회 안에서 오늘날 마리아께서 계시는 자리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마리아의 모성 안에 요약되어 있다. 

 

37.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확한 특징들을 지닌다.  

 

가)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어머니시며 그분의 모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로 또 온 인류에게로 확장된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의 협력은 특별하며 모든 ‘다른 피조물’의 협력과는 구별된다. 마리아의 전구는 (그리스도의 중개와 같은) 사제적 중개의 성격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모성의 질서와 유비 안에 자리한다. 마리아의 전구를 당신 활동에 결합하심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고자 하신(요한 19,27 참조) 바로 그 어머니의 자애와 친밀함 가득한 모성적 모습을 지니고 선사된다.

 

나) 마리아의 모성적 협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참여적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의 모성적 협력은 “그리스도의 중개인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것이다. 마리아께서는 완전히 인격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개에 참여하신다. 마리아의 어머니 역할은 “그리스도의 이 유일한 중개를 절대로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을 보여 준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께서 사람들에게 미치시는 모든 구원의 영향은”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샘솟는 것이므로, “그 영향은 그리스도의 중개에 의지하고 거기에 온전히 달려 있고 거기에서 모든 힘을 길어 올[린다.]” 당신 모성 안에서, 마리아께서는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에 걸림돌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모성적 임무는 그리스도의 임무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고 그리스도를 향한다. 이렇게 이해된 마리아의 모성은 그리스도께만 마땅히 드려야 할 유일한 흠숭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흠숭을 더욱 북돋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자비가 충분하지 못한 데에 대한 필수적 대안이 마리아라는 듯이 그분을 주님의 정의(iustitia) 앞에 위치한 일종의 ‘피뢰침’으로 제시하는 호칭이나 표현은 피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께 드려야 할 신심의 방식을 재확인해 주었다. 곧 그 신심은 “‘어머니께서 존경을 받으실 때에 그 아드님께서 …… 바르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게 하도록’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으로 이끄는 신심”이다. 궁극적으로, 마리아의 모성은 성부의 선택, 그리스도의 행위, 성령의 활동에 종속적이다.

 

다) 교회는 마리아의 영적 모성에 대한 기준점일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모성은 언제나 바로 교회의 성사적 차원 안에서 드러난다. 마리아께서는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행동하신다. 마리아의 모성은 교회적 친교 밖이 아니라 교회의 친교 안에서 교회를 이끌고 동반하는 가운데 행사된다. 교회는 자신의 모성을 마리아에게서 배운다. 복음을 전하고 회심시키며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환대에서,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라는 성사적 삶의 선물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도록 돕는 모성적 교육과 양성에서 그 모성을 배운다. 그러한 까닭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교회의 풍요로움은 마리아의 풍요로움이며, 이는 교회의 지체들이 성모님의 삶을 ‘축소판으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 때, 곧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에 실현된다.”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우리 가운데 태어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시며 결코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려 들지 않으신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열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풍성한 은총 덕분에, 교회, 동정 마리아, 그리고 모든 믿는 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직접 이 생수의 샘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작음 안에서 작음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전구

 

38.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모성과 은총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유일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계시다. 그 암시가 천사의 인사(루카 1,28 참조)에 들어 있다. 여기서 사용한 단어인 ‘은총이 가득한 이여’(kecharitomene, 케카리토메네)는 성경의 다른 어디에도 없다. 성령의 권능을 당신의 태에 받아들여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그분께서는 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다. 모성과 은총의 이 특별한 결합 덕분에 우리를 위한 마리아의 기도는 그 어떤 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가치와 효력을 지닌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중개자’(Mediatrix)라는 호칭을 이러한 모성적 전구의 역할과 연결 지으시면서, 마리아께서는 스스로 “‘가운데에’ 자리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셨다. 곧, 그분께서는 방관자로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위치에서 중개자의 역할을 하신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이 중개자로서 당신 아드님께 인간들의 어려움을 알려 줄 수 있다는 점을 알고 계[신다.]”

 

39. 가톨릭 신앙은 성경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 있는 이들이 사랑의 행위를 이어가며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고 우리를 동반할 수 있음을 읽는다. 예컨대, 우리는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드는 영으로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되는 이들”(히브 1,14)임을 본다. 성경은 천사들이 수행하는 사명도 말한다(토빗 5,4; 12,12; 사도 12,7-11; 묵시 8,3-5 참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마태 4,11 참조)와 수난을 받으실 때(루카 22,43 참조)에 그분을 도와드리는 천사들이 있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40. 이러한 성경 구절들은 하늘과 땅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이들이 우리를 위하여 전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즈카르야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하느님의 한 천사를 묘사한다. “만군의 주님, 당신께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가엾이 여기지 않으시고 언제까지 내버려두시렵니까? 그들에게 진노하신 지 일흔 해나 되었습니다”(즈카 1,12). 마찬가지로 요한 묵시록은 ‘살해된 이들’, 곧 하늘에 있는 순교자들에 관하여 말한다. 이들은 불의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일을 땅에서 이루어 주실 것을 간청함으로써 하느님께 중개하고 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묵시 6,9-10) 그리스계 유다인 전통 안에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의인들이 백성을 대신하여 전구한다는 확신이 있었다(2마카 15,12-14 참조).

 

41. 마리아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나머지 후손들”(묵시 12,17)을 사랑하시며, 사도들이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의 기도에 함께하셨듯이(사도 1,14 참조) 지금도 하늘에서 모성적 전구로 우리의 기도에 함께해 주신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하시면서,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 주신 섬김과 연민의 태도를 이어가고 계신다(요한 2,1-11 참조). 마리아께서 부르신 찬미의 노래에서 우리는,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루카 1,52-53)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4-55)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백성 가운데 한 여인이신 마리아를 본다. 또한 마리아께서 사촌 엘리사벳을 도우려 지체 없이 서둘러 길을 떠나셨음을 안다(루카 1,39-40 참조). 이러한 까닭에, 하느님 백성은 마리아의 전구를 굳게 믿는다.

 

42.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뽑힌 이들 가운데 그 누구보다 그분의 어머니께서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통하여 이루시는 구원 사업 안에서 마리아의 유일무이한 협력이 이루어짐을 확언할 수 있다. 이러한 전구를 통하여 마리아께서는 주님 자비를 드러내는 모성적 표징이 되신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당신 행동에 모성적 면모를 부여하신다.

 

모성적 친밀함

 

43. 다양한 성모 신심, 성화상, 성모 순례지의 존재는 당신 자녀들의 삶 곁으로 다가오시는 마리아의 구체적인 모성을 드러내 보여 준다. 테페약 언덕에서 후안 디에고 성인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의 발현이 그 한 예시이다. 마리아께서는 어머니의 다정한 말투로 그를 부르신다. “사랑하는 나의 가장 어린 아들 후안아.” 후안 디에고 성인이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토로하자 마리아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어머니의 힘을 드러내셨다. “너의 어머니인 내가 여기 있지 않느냐? …… 너는 내 망토 안에, 내 품 안에 있지 않느냐?”

 

44. 마리아의 모성적 사랑에 대한 후안 디에고 성인의 체험은, 마리아의 사랑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그분의 손에 맡겨 드리고 신뢰로 “마음을 열어 그분의 어머니다운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든든한 보호를 얻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체험이다. 성모님의 친밀함이 특별히 드러난 이러한 체험들 외에도 모든 자녀의 삶 안에는 그분 모성의 항구하고 일상적인 표현들이 있다. 우리가 당신의 전구를 청하지 않을 때조차 마리아께서는 우리 곁에 어머니로서 나타나시어, 우리가 성부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관상하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신다. 교회를 향한 이 모성적 친밀함은 지극히 큰 가치를 지니기에 목자들은 이것이 정치적 목적에 오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양한 기회를 빌려 이를 경고하시며 “한 민족과 성모님과의 만남을 자기 것으로만 전유하려는 여러 이념적 문화적 방안들”을 우려하셨다.

 

은총의 어머니

 

45. ‘믿는 이들의 어머니’라는 호칭에 대한 이러한 이해 덕분에 우리는 은총의 삶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특정 표현들에, 용인되기 쉽지 않은 다른 내용을 전하는 개념과 상징이 쉽게 덧붙여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컨대, 때때로 마리아께서 하느님과 분리되는 은총의 보고를 지니신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한 개념 아래에서는, 주님께서 당신의 너그러우며 자유로우신 전능하심으로 유일한 중심에서, 곧 마리아의 성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샘솟는 신적 생명을 나누는 일에 마리아를 결합하기를 바라셨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지 않는다. 또한 마리아는 종종 모든 은총이 흘러나오는 샘으로 그려지거나 상상된다. 삼위일체적 내주(內住)(gratia increata, 창조되지 않은 은총)와 신적 생명에 대한 우리의 참여(gratia creata, 창조된 은총)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신비가 마리아의 손을 통한 ‘옮겨 감’에 달려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개념은 마리아를 지나치게 들어 높여,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사라지게 하거나 제약할 수 있다. 라칭거 추기경은 ‘마리아, 모든 은총의 중개자’라는 호칭이 계시에 명확히 근거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확신에 따라 우리는 이 호칭이 신학적 성찰과 영성에 초래한 어려움들을 인식할 수 있다.

 

46. 이러한 어려움을 피하려면, 은총의 질서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하느님의 성화 은총을 받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도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그분의 모성적 전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심을 깨닫게 하는 “어머니의 이러한 도우심”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삶 안에서 마리아의 모성적 현존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활동에 마음을 열도록 북돋워 주시는 마리아의 여러 활동들을 가로막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리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오직 주님께서만 우리 안에 부어 주실 수 있는 은총의 삶을 우리가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신다. 

 

47. 우리의 구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의 작용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죽음의 이 권세는 각 사람 안에서 오직 구세주의 은총으로만 물리칠 수 있다.”고 확언하고, 불의한 자의 구원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불의한 자들도 의롭게 해 주신 유일한 의인 그리스도가 아니시라면, 누가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 죽고자 하겠습니까? 저의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선행도 하지 않고 온갖 악행만 저질렀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하였어도, 하느님의 자비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았고 …… 그분께서는 받아 마땅한 형벌 대신에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드님께서는 금이나 은이 아니라 당신이 흘리신 피의 값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자 그리하셨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다른 이를 위하여 공로를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이렇게 응답한다. “다른 이를 위하여 첫 은총을 얻어 주는 공로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다.” 다른 어떤 인간도 이에 대하여 엄격한 의미에서 정당한(de condigno) 공로가 없으며, 그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의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은총의 충만함 또한, 마리아께서 당신의 모든 행위에 앞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이를 거저 받으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의 의화를 위하여 작용하며, 우리의 의화는 “신적 참여라는 영원한 선익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하늘과 땅의 창조보다 더 위대한 업적이다.”

 

48. 그런데 이러한 참여는 우리가 다른 이의 선을 열망함으로써 가능해지고, “기도로” 또는 “자비의 활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 애덕의 열망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심이 마땅한(congruo) 일이다. 이는 참으로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그것이 “자연의 비례를 뛰어넘기” 때문이고, 우리의 본성과 그분의 신적 생명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의 원의를 이루어 주시어 성모님께서 겸손한 종으로서 기쁘게 하느님 업적에 참여하도록 하심으로써, 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49. 카나에서 그러하였듯이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께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대신에 그분께서는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 하시며 우리의 결핍과 필요와 고통을 그리스도께 전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행동하시도록 전구하신다. 오늘날에도 마리아께서는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행동에 마음을 열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신다.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에 따라 우리를 그리스도 신비의 심오한 의미로 이끄는 어머니의 참된 교육이 된다. 마리아께서는 우리 삶을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총에 열도록 도와주시기 위하여 경청하시고 결정하시며 행동하신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존재 안에서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닿으실 수 있는 곳

 

50. 교리서가 상기시키듯, 성화 은총은 “먼저, 그리고 주로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성화 은총은 그저 단순한 도움이나 우리가 가진 힘이 아니라 “무상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당신 생명”이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머무시는 삼위일체적 내주, 하느님과 맺는 우정, 그리고 주님과의 계약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이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이루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무한한’ 불균형의 극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몸소 영혼에 “침투하[시게]”(illabitur) 할 그러한 삼위일체의 자기 증여는 믿는 이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변화를 뜻한다. 이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침투하는’ 행위를 묘사하기 위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라틴어 동사 일라비(illabi)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직 하느님께만 적용될 수 있다. 피조물이 아니신 하느님께서만 우리 자유와 정체성의 훼손 없이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와닿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당신 자신을 친구로 내어 주시는 하느님께서만 우리의 가장 내밀한 중심에 도달하시어 우리를 들어 높이시고 변모시키신다. 따라서 “그 어떤 피조물도 은총을 줄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사적 은총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주요 원인(causa principalis)이신 “하느님께서만 성사의 내적 효과를 불러일으키신다. 첫째, 오직 하느님께서만 영혼에 침투하시고, 그 영혼 안에서 성사적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어떤 행위자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직접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둘째, 성사의 내적 효과인 은총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

 

51. 다른 저술가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표현해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나벤투라 성인을 강조할 만하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하느님께서 성화 은총으로 인간 안에서 활동하실 때 그 사람을 당신께 절대적으로 직접 닿게 만드신다고 가르쳤다.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오직 당신만이 이루실 수 있는 절대적 직접성, 곧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의 ‘침투’를 통하여 인간에게 온전히 가까이 다가오신다. 그러면 창조된 은총은 ‘매개 수단’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우정의 직접적인 효과가 되어 인간의 마음을 직접 어루만지는 것이다. 당신 자신을 친구로 내어 주시면서 개개인의 변모를 불러일으키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과 변모된 개인 사이에는 그 어떤 매개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우리를 성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직접 닿으실 정도로 그처럼 깊이 들어오실 수 있고, 오직 하느님께서만 인격을 훼손하지 않으시면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

 

52. 하느님의 영원하신 친아드님께서는 강생을 통하여, 구원 경륜 안에서 유일무이한 자리를 가지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 “의심할 나위 없이 무한한” 은총에 힘입어 성자와 위격적으로 결합된 이 인성 안에 “은총이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이 은총의 풍성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그분께 속한다’(competit sibi). 이것이 머리이신 그분의 역할이다.” 그분의 인성은 성화 은총을 부어 주는 일에 참여하여, 그 은총이 그분 인성으로부터 흘러넘치거나 ‘더욱더 늘어난다.’ 그리하여 머리이신 그분께로부터 은총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기에(in alios trasfundetur), “어떤 의미로, 그분께서는 당신 인성에 따라 모든 은총의 샘이시다.” 이러한 인간 본성은 우리의 구원과 분리될 수 없다. “강생과 더불어, 하느님 말씀의 모든 구원 행위는 언제나, 그분께서 모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취하신 인간 본성과 일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당신께서 취하신 이 인간 본성을 통하여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고]” 그 인간 본성 안에서 “자유로이 흘리신 당신 피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어 주셨[다.]” 믿는 이들은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바오로 성인의 말씀처럼, 그분과 이루는 내밀하고도 유일한 일치를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53. 어떤 인간도, 사도들이나 복되신 동정녀조차도 은총의 보편적 분배자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은총을 주실 수 있으며,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하여 은총을 주신다. “인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지극히 충만한 은총을 지니셨기” 때문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탁월하게 “은총이 가득하신 분”이시자 “하느님의 어머니”이시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의 양녀이시며, 단테 알리기에리가 기록한 대로 “당신 아드님의 딸” 이시기도 하다. 그분께서는 파생적이고 종속적인 참여를 통하여 구원 경륜에 협력하신다. 그러므로 은총 안에서 마리아의 ‘중개’에 관한 어떤 표현도 그리스도와 그분의 유일한 중개에 대한 먼 유비로 이해되어야 한다.

 

54. 은총의 전달에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완전한 직접성에는 마리아조차 개입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이나 삼위일체적 내주도 마리아나 성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선익을 바라시며 우리와 함께 그것을 청하신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법칙’이기도 한 전례에서 우리는, 마리아께서 은총의 전달이 아니라 모성적 전구 안에서 하시는 이러한 협력을 재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전례에서는 마리아에게 부여된 특권이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향하도록 마련되었는지를 설명하며 마리아께서 “은총의 전구자”가 되셨다고 말한다. 곧,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은총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시며 전구하신다.

 

55.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르치듯, “복되신 동정녀께서 사람들에게 미치시는 모든 구원의 영향은 ……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을 결코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도와준다.” 그러므로 마치 하느님의 은총이 (마리아와 같은) 여러 중개자를 통하여 내려오지만 그 궁극적 원천(하느님)이 우리 마음과 단절된 채 남아 있는 것처럼 은총의 단계별 내려옴이라는,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제시를 하는 어떤 표현도 피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은총을 통하여 주님과 믿는 이의 마음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밀하고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만남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사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만 의롭게 하실 수 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우리를 들어 올려 하느님 생명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 한없는 불균형을 극복하게 하신다. 오직 그분께서만 삼위일체적 내주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다. 오직 그분께서만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가 변화되고 그분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오직 하느님께만 속한 이 일의 성취에서 마리아에게 어떤 중개의 역할을 돌리는 것은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다.

 

흘러나오는 생수

 

56. 마리아께서는 은총으로 가득하시고, 선은 언제나 타인에게 자기를 전하려 하기에, 마리아로부터 은총이 “넘쳐흐른다”는 개념이 생겨나기 쉽지만, 이 개념은 오직 앞서 언급한 내용과 모순되지 않을 때에만 적절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논의된 협력의 여러 형태들(하느님의 성화 은총에 마음을 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마리아의 중개와 모성적 친밀함)을 특히 염두에 둘 때 아무런 어려움을 제기하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피조물의 다양한 협력으로 제시하였다.

 

57. 특히 마리아를 비롯하여 믿는 이들이 하느님의 은총 전달에 협력할 때 수행하는 근본적인 준비 역할은 믿는 이들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들”(요한 7,37-39 참조)이라는 전통적 해석에 표현되어 있다. 이 강력한 표상은 마치 믿는 이들이 성화 은총의 완전한 전달 통로인 듯이 해석될 수 있으나, 교회 교부들은 성령의 강이 넘쳐흐르는 현상을 설교, 가르침, 계시된 말씀의 선물을 전하는 그 밖의 다른 방식들처럼 하느님의 성화 은총을 받기에 맞갖게 해 주는 행위들의 맥락에서 언급하였다.

 

58. 오리게네스는 ‘생수의 강들’이라는 표상을 성경 연구나 그 영적 의미의 인식에 적용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 성인에게, 이 강이 넘쳐흐르는 것은 신앙의 신비에 대한 가르침, 곧 단순히 지적인 차원을 넘어 하느님의 은총을 위한 인격 전체의 열린 마음가짐이나 준비와 관련된 가장 깊은 의미의 ‘순수한 신비 교육’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은 이 표상이 만물을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이를 스테파노의 지혜나 베드로의 말씀의 권위와 연결한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렇게 확언한다. “이는 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각 사람의 마음에 쏟아부을 수 있도록 말하는 강들이다.” 그리고 이를 이렇게 적용한다. “천상 가르침의 물이 솟아나기를, …… 주님 말씀의 이슬방울이” 각 사람의 마음에 “뿌려지기를 바란다.” 예로니모 성인에게도 그 물은 구세주의 가르침이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에게도 그러하였고 교황께서는 그 물이 “이웃을 향한 신실한 의지”를 상징한다고 덧붙여 가르치셨다. 믿는 이들에게서 샘솟는 ‘생수의 강들’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은 성경과 그 신비들에 대한 앎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일반적으로 단지 지적인 앎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앎과 마음의 깨달음을 의미하여, 마음이 신비의 실체 그 자체에 열릴 수 있도록 한다.

 

59. 여러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에게서 우리는 설교와 교리 교육 외에도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거나 사랑의 증거가 되는 행위를 포함하는 더 넓은 해석을 발견한다. 이처럼 푸아티에의 힐라리오 성인은 생수의 강을 이웃의 유익한 덕행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성령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표상을 “이웃의 관심사를 살피려는 선의”에 적용한다. 중세 시대에 이러한 관점은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게까지 이어졌는데, 그에게 ‘생수의 강들’은 누군가 “다른 이들을 돕고 자신이 하느님께 받은 은총의 다양한 선물들을 나누려고 서둘러 행동할 때”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마음에서부터 생수가 흘러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60.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이웃을 섬기기 위한 ‘은총의 다양한 선물들’에 대하여 말할 때, 이는 다양한 은사적 선물들을 가리키는데,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 10절에서 말하듯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주어졌고, 다른 이에게는 병을 고치는 은사 등이 주어졌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은 예루살렘의 치릴로 성인의 사상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믿는 이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성령의 생수의 강들이 드러나는 때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성령께서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 지혜를 주시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예언으로 비추어 주시며, 이 사람에게는 마귀를 쫓는 능력을 ……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이에게는 강인한 절제력을 주시고, 어떤 이에게는 자비를 베풀게 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단식과 수덕 생활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61. 요한 복음 14장 12절의 해석에서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삶에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meizona)을 믿는 이들이 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 요한 복음 17장 20절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이라고 명확히 언급하듯, 믿는 이들은 말씀 선포를 통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이들의 믿음에 불을 붙이며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한다. 요한 복음 14장 6-11절에도 이와 동일한 생각이 드러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은 아버지를 뵙게 하는 일이다(8절). 믿는 이들의 일은 말을 통한 복음 선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일에 비견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다. “사람들이 ……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ㄷ).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처럼(요한 5,24 참조), 예수님께서는 또한 당신을 믿는 이들의 말을 통하여 다른 이들이 믿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요한 17,20 참조).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의 말뿐만 아니라 생생한 증언도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믿는 이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청하신 이유이다. 곧 “세상이 믿게 하[려는]”(요한 17,21) 것이다.

 

세상 안에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62. 요한 복음은 형제애와 이러한 선익의 나눔을 밀접하게 연결 짓는다. 참으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는 선언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도] 할 [것이다.]”(요한 14,12)라는 구절과 나란히 제시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대하시는 열매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이를 형제애와 동일시하신다(요한 15,16-17 참조). 마찬가지로, 바오로 성인은 믿는 이들이 펼칠 수 있는 여러 가지 특별한 은사들(1코린 12장 참조)에 대하여 말한 뒤에 더욱 뛰어난 길을 제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더 큰 은사(ta meizona)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kath’hyperbolen)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 이 길이 바로 사랑이다(1코린 13,1 참조). 따라서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들, 일상적인 수고나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도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63. 현대의 교황들께서도 비슷한 생각을 표명하셨다.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마음과 정신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께 결합되어 외적 사물에 자신의 활동을 적용시킨다면, 그들의 일은 어찌 보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지속시키는 것으로 보이며, 바로 거기서 구원에 유익한 힘과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구원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러한 협력을 세상 안에서 죄 때문에 상처 입은 선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세우는 것으로 이해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심은 선과 아름다움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우리의 협력을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것이 바로 구세주의 성심이 요구하시는 진정한 보속이다.”라고 덧붙이셨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사랑의 주체가 됩니다. 인간은 은총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고 사랑의 그물을 짜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주고받는 사랑의 역동성이 교회의 사회 교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이것이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에게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녀의 마음을, 그녀의 완전한 신뢰를 통하여 그분 사랑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랑이 그녀의 삶을 통하여 다른 이들에게 퍼져 나가 세상을 변모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었고, 이는 “우리가 교회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형제적 사랑의 행위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성심이 지니는 치유의 힘이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내놓는 것입니다.”

 

64.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고 성령의 활동으로 북돋워진 이 협력은, 마리아의 경우에,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몸소 부여하신 모성적 특성 때문에 다른 어떤 인간의 협력과도 구별된다.

 

기준

 

65. 은총의 질서 안에서 마리아의 협력에 대한 다른 어떤 이해 방식, 성화 은총의 전달에서 특히 마리아에게 어떤 형태의 개입, 완전한 도구로서의 특성, 또는 제2원인의 속성을 부여하려는 경우에는 이미 교회 헌장에 나타나 있는 다음의 몇 가지 기준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가) 우리는 마리아께서 어떻게 우리와 주님 사이의 “직접 결합”을 촉진하시는지 성찰해야 한다. 이 결합은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이루어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마리아와 이루는 결합이 그리스도와 이루는 결합보다 더 직접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은총을 전달하실 때 마리아를 도구로서 또는 제2원인이자 완성원인(完成原因, causa perficiens)으로서 우리에게 선사하신다는 관념에 그러한 위험이 있다.

 

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복되신 동정녀께서 사람들에게 미치시는 모든 구원의 영향은 사물의 어떤 필연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호의에서 기인[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영향력은 오직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비추어 볼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의 행위 자체로도 넘쳐흐르고 아주 충만한데도, 그분께서는 자유롭게 또 아무 대가 없이 마리아를 당신 사업에 참여시키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마치 하느님께서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마리아가 필요하다는 듯이 마리아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다) 우리는 마리아의 중개를 하느님께서 더 풍요롭고 더 아름답게 온전히 일하실 수 있게 하는 보완적인 도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마리아의 중개는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존엄과 능력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고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 방식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마리아의 중개에 대하여 설명할 때, 하느님 홀로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하느님께서만 우리 의화를 위하여 필요하고 완전히 충분한 유일한 공로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쓰신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마리아께서는 주님께서 이미 하신 어떤 행위에서도 그분을 대신하지 않으시고(곧, 그분에게서 아무것도 빼지 않으시고), 그분을 보완하지도 않으신다(곧, 그분께 아무것도 보태지 않으신다). 마리아께서는 은총의 전달이라는 그리스도의 구원 중개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으시므로, 그 은총이 자유로이 베풀어질 때의 일차적 도구로 여겨지셔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자신의 일에 힘입어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동반하실 때 결코 그분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셔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께 결합되시어, 당신 아드님께서 주신 선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 자리하게 되시며, 그 선물은 그분께서 모성적 특성으로 주님의 일에 동반하실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확실한 지점, 곧 마리아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성화 은총을 받도록 준비시키시는 데 기여하시는 역할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리아께서는 다른 이들을 “어떤 식으로든 준비시키실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신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으로도 기여하시는 행위를 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종 목적으로 이끄는 것은 최고 권능의 소관이며, 하위 능력들은 그 최종 목적 도달을 위하여 [주체를] 준비시킴으로써 기여하기” 때문이다.

 

6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루카 1,46). 마리아의 온 존재가 주님을 향하고 있기에, 앞서 언급한 모든 내용은 마리아를 모욕하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영광 외에 다른 영광은 없다.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자녀들을 동반하시며,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변화시키며 채워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의 무한하고 참으로 충만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시는 모습을 보실 때 더욱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거나 마리아를 하느님의 아드님과 동등한 위치에 두려는 모든 시각은 참된 마리아 신심의 고유한 역동에서 벗어난다.

 

은총들

 

67. ‘모든 은총의 중개자’와 같은 일부 호칭들은 마리아의 특별한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닌다. 사실, 최초로 구원받은 분이신 마리아께서는 당신이 받은 은총의 중개자가 되실 수 없다. 이는 어떤 중심적인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곧, 마리아의 경우에도 은총의 선물은 그분보다 앞서 주어지고, 삼위일체께서 그리스도의 공로에 비추어 절대적으로 무상으로 주도하신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마리아께서는 당신 자신의 어떤 선행 행위의 공로로 의화되신 것도 아니고, 그 어떤 후속 행위의 공로로 의화되신 것도 아니다. 마리아의 경우에도 은총으로 말미암은 하느님과의 우정은 언제나 무상으로 베풀어진 것이다. 마리아의 소중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일에 그 누구보다 순종과 완전한 신뢰로 자신을 열고 또한 변화를 가져오는 그 은총의 힘을 가장 크게 보여 주는 사람이 지니는 믿음의 수용성에 대한 최고의 증거이다. 

 

68. 반면, ‘모든 은총의 중개자’라는 호칭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는 인격적 관계와는 별개로 마리아를 영적 선이나 힘을 분배하는 존재로 제시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은총들’이라는 용어는 우리 삶의 여러 순간에 주어지는 마리아의 모성적 도움을 가리킬 때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은총들’이라는 복수 형태는 주님께서 어머니의 전구를 들으시어 우리에게 베푸시는 (물질적 도움까지 포함하는) 모든 도움을 표현한다. 이러한 도움들은 결국 우리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에 열려 있도록 준비시켜 준다. 이처럼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 신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어떤 성인보다도 훨씬 더 가까이 계신다.

 

69.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조력 은총’이라 불리는 성령의 내적 충동을 허락해 주시도록 간구하실 수 있다. 이는 성령께서 죄인들 안에서도 작용하시어 그들의 의화를 준비시키시고 이미 성화 은총으로 의화된 이들이 더욱 성장하도록 격려하시는 도움이다. 바로 이러한 특별한 의미에서 ‘은총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이해해야 한다.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겸손되이 협력하신다. 오직 주님께서만 성화 은총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를 의화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삼위일체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시고 친구로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며 우리를 당신의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하실 때에 가능하다. 이는 오로지 주님의 고유한 활동이다. 동시에, 마리아의 모성적 전구를 통하여 우리가 받는 말씀, 표상, 또는 다양한 감도들이 우리가 삶에서 항구할 수 있도록 돕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위하여 우리 마음을 준비하게 하며, 우리가 무상으로 받은 은총의 삶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울 가능성을 가로막지 않는다.

 

70. 주님에게서 오는 이러한 도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고자 하신(요한 19,25-28 참조) 바로 그 어머니의 자애와 친밀함 가득한 모성적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처럼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고양시키고 치유하시는 성화 은총에 마음을 열도록 돕는 특별한 일을 수행하신다.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여러 ‘움직임들’을 불러일으키실 때마다, 이는 언제나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일하시는 단 한 분께 우리의 삶을 열도록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리아와 우리의 결합

 

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리아를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즐겨 불렀는데, 이는 마리아의 모성적 협력의 보편성을 잘 표현한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은총 그 자체이자 모든 은총의 창조주시라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 호칭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72. 은총의 세계에서 마리아의 이 모성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또한 각 제자가 마리아와 “유일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를 “그리스도 제자의 삶에서 차지하는 마리아의 중요성”이라고 표현하시며, 이는 “어떤 사람의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표현된다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은총의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이루는 관계를 포함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은총으로 이루는 일치는 우리가 마리아와 신뢰와 자애, 아낌없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 이루는 일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첫 제자

 

73.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길을 가장 잘 배운 첫 제자”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루카 11,28) 이들 가운데 첫째이시다. 마리아께서는 주님의 약하고 가난한 이 가운데 몸소 자리하신 첫 번째 사람이 되시어,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는 구원을 확신에 차 기다리며 받아들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이처럼 “어머니로서 마리아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첫 ‘제자’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부르시기 전에 가장 먼저 마리아께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신 듯하다(요한 1,43 참조).” 마리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 아드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협력, 성령의 활동에 대한 개방성으로 교회에 믿음과 사랑의 모범이 되셨다. 그러한 까닭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신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신 것이 마리아께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분께서는 어머니이시기보다도 제자이시다.” 하고 강조하셨다. 마리아께서는 결국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신]” 분이시다.

 

74.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마리아께서는 “처음으로 ‘믿으신’ 분이시고, 신부이시며 어머니의 믿음으로 당신께 자신을 의탁하는 모든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자 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자녀가 영적 삶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친밀함의 표징으로 가득한 애정으로 그 일을 하시고, 그리스도의 은총이 더 활발히 작용할 수 있게 하라고 그들을 가르치신다. 이 애정과 신뢰의 관계 안에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은총을 받아들이고 이미 받은 은총에 항구하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삶 안에서 하시는 일을 묵상하도록 가르치신다(루카 2,19 참조).

 

75. 이미 교회에서 긍정적인 판정을 받은 이른바 초자연적 현상들의 경우에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표현들이나 호칭들이 등장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신앙교리부에서 ‘장애 없음’(Nihil obstat)이 주어질 경우 …… 그러한 현상들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곧, 신자들이 신앙의 동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어머니

 

76. “첫 제자이신 마리아께서는 어머니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마리아께 맡기셨다. “우리가 어머니 없이 걸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셨기에 우리를 그분께 데려다주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믿는 이들의 어머니가 되신 “모든 믿는 이의 어머니”이시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복음화하는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각각의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여정 중인 백성으로서 부르시고자 하신 대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분이다.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 우리 곁에 계시며, 당신의 전구와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시고자 하[신]다.” 마리아께서는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어머니이시니, “백성들 가운데에서 온유하고 사랑이 넘치는 돌봄으로 활동하[신]다. 마리아께서는 백성들의 걱정과 어려움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다.”

 

사랑은 멈추어 신비를 묵상하며 침묵 가운데 그 신비를 누린다

 

77. 충실한 하느님 백성은 마리아께 다가갈 때 그리스도나 복음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느님 백성은 “이 어머니의 모습 안에서 복음의 모든 신비”를 볼 수 있다. 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그들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루카 15,4-8 참조),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으러 오시는 주님(루카 15,20 참조), 우리 앞에 멈춰 서시는 주님(루카 18,40 참조), 몸을 굽히고 우리를 들어 올리시어 볼을 비비시는 주님(호세 11,4 참조), 사랑으로 우리를 굽어보시는 주님(마르 10,21 참조), 그리고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는 주님(요한 8,11; 호세 11,9 참조)을 반영하는 모습을 본다. 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많은 가난한 이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루카 1,52) 주님을 알아본다. 어머니의 얼굴은 강생의 신비를 노래한다. 칼에 꿰찔린 어머니의 얼굴(루카 2,35 참조)에서 하느님 백성은 십자가의 신비를 알아보고, 파스카 빛으로 물든 바로 그 얼굴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을 깨닫는다.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 위층 방에서 사도들을 기도로 지원해 주신 분(사도 1,14 참조)도 바로 그분이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도적 증언에 따르면, 마리아의 믿음이 어느 면으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믿음이 ……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78. 라틴 아메리카 주교들이 단언했듯이, 가난한 이들은 “마리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애정과 사랑을 발견한다. 그들은 마리아 안에서 복음의 핵심 메시지가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단순하고 가난한 백성은 영화로운 어머니를 복음서에 등장하는 나자렛의 마리아와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영광 뒤에 숨겨진 단순함을 알아보고, 마리아께서 여전히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심을 깨닫는다. 그분께서는 다른 어머니들처럼 태중에 아기를 품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요셉 성인의 도움을 받아 사랑으로 당신의 아이를 키운 분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모성에 따른 격변과 불안을 경험한 분이시기도 하다(루카 2,48-50 참조). 마리아께서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신]”(루카 1,53) 하느님을 노래하는 분이시고,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신랑 신부와 함께 고민하는 분이시며(요한 2,3 참조), 도움이 필요한 사촌을 돕기 위하여 서둘러 길을 나서는 법을 아는 분이시고(루카 1,39-40 참조), 당신 아드님께서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이 되신 민족의 역사 때문에 칼에 꿰찔린 듯한 상처를 기꺼이 입은 분이시며, 이주민이나 망명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분이시고(마태 2,13-15 참조), 가난하여 어린 비둘기 두 마리밖에 바칠 수 없던 분이시며(루카 2,24 참조), 가난한 목수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멸시받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시다(마르 6,3-4 참조). 고통받는 이들은 마리아께서 자기와 함께 걸어가고 계심을 알기에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어머니를 찾는다.

 

79. 어머니의 친밀함은 다양한 민족들 안에 각기 다른 형태를 띠는 ‘대중적인’ 마리아 신심을 낳는다. 대한민국, 멕시코, 콩고,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에서 마리아의 다양한 얼굴들은 복음이 토착화되는 방식이며, 이로써 민족들의 가장 중심부에까지 이르는 “하느님의 자부적 다정함”이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반영된다.

 

80.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함께 묵상하자. 이 신앙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인 수많은 믿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소 권고하신 대로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자연스럽게 알아본다. 하느님의 백성은 다양한 성모 성지를 즐겨 순례하며, 지치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어머니의 돌봄을 받는 이들처럼 항구할 수 있는 위로와 힘을 그곳에서 얻는다. 아파레시다 총회는 이러한 경험의 깊은 신학적 가치를 명료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었다. 이 공지를 마무리하며 그 표현보다 더 적합한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정 중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을 알아볼 수 있는 순례를 강조한다. 순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어가며 수많은 형제들 안에 둘러싸이는 기쁨을 경축한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순례자가 되시어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길을 가신다. 성지를 향해 걷겠다는 결심은 신앙 고백이며, 걷는 행위는 희망의 참 노래이고 도착은 사랑의 만남이다. 순례자의 시선은 하느님의 자애와 가까이 계심을 상징하는 성화상 위에 머문다. 사랑은 멈추어 신비를 묵상하며 침묵 가운데 그 신비를 누린다. 또한 자신의 고통의 무게와 꿈을 모두 쏟아 바치며 감동을 얻는다. 신뢰 안에서 흐르는 진실한 탄원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자기 충족을 포기한 마음의 가장 훌륭한 표현이다. 이 잠시의 순간에 순례자의 생생한 영적 체험이 응축되어 있다.”

 

충실한 하느님 백성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레오 14세 교황 성하께서는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10월 7일에, 아래에 서명한 신앙교리부 장관과 교리 부서 차관에게 허락하신 알현에서, 2025년 3월 26일 신앙교리부 정례 회의에서 결정된 이 공지를 승인하시고 공표하게 하셨다.

 

 

로마 신앙교리부에서

2025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

교리 부서 차관 아르만도 마테오 몬시뇰

 

2025년 10월 7일 알현에서

레오 14세 교황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60057?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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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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