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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안동교구]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修德者), 홍유한 선생을 찾아서
  • 작성자 홍보전산
  • 작성일 2026-06-02 오전 9:31:25
  • 조   회 30

 

새롭게 엮어 쓰는 천주교 성지순례기 - 2회

Ⅱ편 - 인물 별 성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修德者), 홍유한 선생을 찾아서

 

우곡 성지(안동교구) / 홍유한 고택지(안동교구

“새롭게 엮어 쓰는 천주교 성지순례기” 두 번째 글입니다. 박해기 별(Ⅰ편) 성지 1회차에서, ‘을사 추조적발사건’과 김범우에 관련된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오늘은 인물 별(Ⅱ편) 성지의 첫 회로, 농은 홍유한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임금이 할아버지 홍중명에게 내린 정려문(旌閭門) 현판을 서울에서부터 충남 예산을 거쳐 경북 영주에까지 가져다 세운 홍유한. ‘손자의 도리’라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 그가 품은 속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순례자가 안동교구의 우곡 성지를 순례하는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먼저 깨닫고 미리 와서 예수의 길을 마련하고 곧게 닦은 사람이었습니다. 농은(隴隱) 홍유한(1726~1785) 선생도 앞서 깨닫고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홍유한 선생은 조선 후기 대(大) 유학자였던 성호(星湖) 이익 문하에서 학문을 시작했습니다. 홍유한 선생은 정통 유학자였지만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와, 스페인 신부 판토하가 쓴 천주교 윤리수양서 <칠극>을 접하고서 참된 진리에 다가섰습니다. 그리고선 턱수염 쓸어내리며 탁상공론(卓上空論) 하던 자신을 반성했습니다. 믿음으로 고양된 진리를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낯선 곳으로 아예,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득도(得道)의 경지!’ 

학문이 신앙으로 옮겨가기에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했습니다. 홍유한 선생은 이거(移去)한 곳에서 공부하며 노동하고 기도했습니다. 일곱째 날만 쉬고 금육과 금욕의 수계(修禊)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십 년을 살았습니다. 

선생은 욕망을 다스린 자기 절제와 희생이야말로 신앙의 첫 관문을 여는 열쇠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서울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전례 집회가 있기 두 달 전, 그러니까 1785년 1월 홍유한 선생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세례받고 한국천주교회를 세웠습니다. 세례받지 않고도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修德者)가 된 그는 한국천주교회 탄생의 보이지 않은 밑거름입니다.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홍유한입니다. 

홍유한 선생이 나신 곳은 서울입니다. 그러나 그는 충남 예산의 여사울에 가서 학문을 일으켰습니다.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司徒)’ 이존창1)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존창이 홍유한 선생의 애제자였으니 충청의 내포, 그중에서도 여사울이 한국천주교 신앙 공동체라는 거대한 장강(長江)의 시원지(始原地)가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 발로 찾아와 그의 제자가 된 이들은 권철신2), 권일신3), 이기양 등 남인계 유학자들로, 천주교회의 시조가 된 분들입니다. 홍유한 선생의 아들 홍낙교와 홍낙질, 칠촌 당질인 홍낙민4), 그리고 면천(免賤)의 은혜를 입은 이존창도 그에게 배웠습니다.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과 두 번째 최양업 신부 모두 이존창의 후손들인데, 이존창은 홍유한 선생으로부터 배운 뒤 세례받고 고향인 충청지역에 처음 전교한 이였습니다. 배움에 그치지 않고 나아간 믿음이 순교의 씨앗이 되었고 교회는 거목으로 자랐습니다.

홍유한 선생의 제자이자 조카뻘인 홍낙민 루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해 2014년 교황 프란치스코가 집전한 시복식에서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5)는 아버지보다 삼 개월 먼저 순교해 함께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기해박해 때인 1840년 당고개에서 순교한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는 1984년에 ‘103위 성인’이 되었는데 홍유한 선생의 손자들입니다. 홍재영의 아들 홍봉주 토마스6)와 그의 아내 심조이 바르바라7), 부부의 두 아들도 순교했습니다. 사대(四代)를 이은 순교 집안입니다. 신유, 기해, 병인박해마다 그들은 잡혔고 문초당했으나 신앙을 지키려고 끝내 순교했습니다. 잔인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해자들에게 목숨이 끊겼기에 믿음은 이어갈 수 있었다”라고요. 

직계는 아니지만, 후손인 홍지영의 부인이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8)입니다. 강완숙 골롬바는 전처의 소생이었던 홍지영의 아들 홍필주 필립보9)에게 극진한 보살핌과 사랑을 주었습니다. 계모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홍 필립보는 교회 일을 맡았다 체포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라면 비록 사형을 받을지라도 달게 여기겠다.”라는 고백을 끝으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당했습니다. 모두 홍유한의 후손들로, 풍산 홍씨 일가의 순교자들입니다.

이 거룩한 분들을 가묘(假墓)로 모시고 홍유한 선생을 기리며 그의 삶을 묵상하기 위한 곳이 경북 봉성면에 있는 우곡 성지(순례지, 안동교구)입니다. 성지 입구 오른편에 있는 홍씨 일가의 가묘 터를 지나 산기슭을 조금 더 올라가면 홍유한 선생이 실제 묻히신 곳에 이릅니다. 우곡 성지(경북 봉화군 봉성면 시거리길 397)는 해발 1,206m 문수산 중턱에 있는 선생의 묘를 꼭짓점으로 해서 넓게 퍼져있습니다. 

우곡 성지에 들어서면, 기분 좋은 서늘함이 먼저 다가옵니다. 눈 뜨기 어려울 정도의 찬란한 햇빛과 한여름 더위도 성지에서는 체념하고 물러섭니다. 그 정도로 골과 숲이 짙고 깊습니다. ‘우곡’(愚谷)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데 어리석을 정도로 가감 없이 우직한, 천연 계곡의 모습입니다. 성지의 가운데를 갈라 흐르는 계곡의 풍성한 물은 날래고 힘찰 뿐더러, 성지 안팎을 오가며 울고 웃는 새들의 재잘거림은 순례자가 처음 들어보는 소리의 향연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태초의 그 모습, 원시의 그 소리가 아닐까 합니다. 

홍유한 선생이 추구했던 칠죄종(七罪宗, 교만, 질투, 인색, 분노, 음식에 빠짐, 여색에 빠짐, 선에 게으름)의 극복은 이처럼 ‘날 것의 자연’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곡 성지는 생활 속, ‘칠극의 기도’를 제안합니다. 십자가의 길과 유사한 ‘칠극의 길’ 기도도 함께 보여줍니다. 교만을 억누르고, 질투를 가라앉히며, 음란함을 막아내고, 탐욕을 풀며, 분노를 없애고, 나태를 채찍질하며, 탐내어 먹고 마시는 것을 막아내는 실생활의 실천을 권고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몸과 마음, 옹근 나 자신과 대면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우곡 성지. Ⓒ정민<br>
우곡 성지. Ⓒ정민

 

우곡 성지. Ⓒ정민

우곡 성지. Ⓒ정민

 

홍유한 선생이 남행을 결행하여 실제로 정착한 곳은 경북 영주시 구구리(옛 지명 구고리)의 홍유한 고택지(순례지, 안동교구)입니다. 이 아담한 고택 입구에는 홍유한의 할아버지인 홍중명(洪重明, 1654~1686)의 효(孝) 실천을 치하하여 임금이 내린 정려문(旌閭門) 현판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홍중명은 “병중인 어머니의 변을 맛보아 병세를 가늠하고, 위급하면 손가락을 끊어 소생케 했으며 모친상을 지낸 후에도 움막을 지어 삼 년의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자신도 상복을 벗은 지, 사 년 만에 죽었다.”니, 그 믿기 힘든 전설 같은 효행은 임금의 칭찬을 받고도 남음이 있지요. 이 정려문이 마치 대문처럼 되어 있어 가톨릭 성지라기엔 다소 낯섭니다. 마치 어느 문중의 사당에 들어서는 느낌인데, 이 성지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른 믿음과 전통을 인정하고 이어가려는 노력 말입니다.

성지가 위치한 경북 영주시는 유교문화의 발상지라 일컫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유한 고택지(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 322-5) 바로 옆 마을인 순흥면에 위치한 소수서원은 명종 임금이 조선 최초로 이름(현판)을 내린 사학(私學) 기관입니다. 유학(儒學)을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곳이지요. 홍유한 선생이 천주학이라는 새로운 공부와 실천을 위해 찾아온 곳이 하필, 영남 지방 유학의 총본산이었던 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소수(紹修)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旣廢之學 紹而修之)”에서 따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효 정려문을 충청도 예산(여사울)을 거쳐 이곳 영주까지 가져와 자신의 천주학 수계 장소에 보란 듯이 세운 홍유한 선생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새로운 진리의 바다에 풍덩 빠지고서도 한 손에는 실낱같은 ‘학통(學統)’을 놓지 못해 몸부림치는 자신의 솔직한 존재 증명은 아니었을지요. 아니, 여전히 정통 유학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유학을 보완하고 그 한계를 극복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있음을, 그 길을 찾았음을 당당하게 고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순례자가 우곡 성지 내 <칠극 성당>의 순례자 미사에 참례했는데, 마침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미사로 봉헌된 것은 참으로 우연입니다. 선각자 홍유한 선생의 삶을 묵상하다가,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른 것은 그 우연 중 필연입니다. 순례자는 함께 미사에 참례하며 기도하는 순례 동행인(同行人), 장모님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앞선 이들 덕분으로 예수님을 알 수 있었고 그분께 의탁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앞에서, 내 신앙을 앞서 실천하신 성조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부모님들께 감사했습니다. 순례자는 미사가 끝나고 우곡 성지를 떠나며 뒤돌아 고개 숙여 깊은 인사를 드렸습니다. 뜬금없이 말입니다.

 

홍유한 고택지.&nbsp;Ⓒ정민
홍유한 고택지. Ⓒ정민

 

각주
1), 2), 3), 5), 6) 하느님의 종,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 133위
4), 7), 8), 9) 한국 순교복자 124위


정민(안드레아)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28년 동안 일했다. 정년을 앞당겨 명예퇴직하고 그 후로 2년 동안 장모님과 아내를 모시고(!) 전국의 천주교 성지를 순례했다. 앞으로도, 일하다 순례하며 기도하고 또 글 쓰고 나누며 소통하길 원한다. 장편 소설 <변절의 시간>(퍼플, 2024)을 썼고, 유재식 신부 유고 강론집 <꼰대 신부의 열린 교리>(기쁜소식, 2025)를 펴냈다. kpfandrew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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