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프란치스코 교황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통해 삶과 인간을 읽어왔습니다. 청춘의 시절에 적어도 저에게는 문학 평론이 인생에 대한 가장 탁월한 철학과 사상이었습니다. 김현과 김우창의 글들을 통해 사유의 궤적과 세상의 흐름을 읽었습니다. 소설은 사람들의 속내와 생의 이면을 바라보게 하는 훌륭한 교재였습니다. 최인훈과 김승옥의 작품들을 통해 역사의 이면과 삶의 속살을 훔쳐보곤 했습니다. 시를 통해서는 인식과 정념이 그려내는 다채로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고, 생의 비의(秘儀)를 언뜻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이성복과 허수경의 시를 통해 언어의 리듬, 섬세한 통찰, 마음의 풍경이 주는 아름다움을 배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좋아했습니다. 저의 주관적 견해이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고, 역대 교황님들 가운데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황님의 말과 글은 항상 깊은 울림이 있고, 그분의 행동과 태도는 늘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사제 양성에 있어서 문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서한을 읽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미래의 사제들은 인간 문화의 핵심과 모든 개개인의 마음에 접근하는 방법을 문학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문학은 공감과 연대의 감수성을 키우게 해줍니다. 문학을 통해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문학은 인간 경험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바라보는 시선을 독자에게 폭넓게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 할 때에 인내를, 복잡한 상황을 마주할 때에 겸손을, 사람들을 판단할 때에 온유를, 우리 인간 처지에 대한 감수성을 가르쳐 줍니다."1) 사실 "오늘날 신앙에 관한 문제는 주로 개별 교리들에 관하여 더 믿느냐 덜 믿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동시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물과 다른 인간들 앞에서 깊은 감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수성을 되살리고 풍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2) "문학은 이성의 자유롭고 겸손한 사용, 인간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깊은 인식, 인간 감수성의 확장, 나아가 많은 목소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영적 개방성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3) "문학의 도움으로 독자들은, 때로는 우리의 교회 담론을 오염시킬 위험이 있고 하느님 말씀의 자유를 옭아매는 자기 지시적인 언어, 거짓된 자기충족적 언어, 굳어진 관습 언어의 우상들을 무너뜨립니다. 문학적인 말은 언어를 생동감 있게 하고 해방시키며 정화하여, 궁극적으로 더 풍부한 표현과 확장의 전망을 향하도록 열어 주는 말입니다. 문학적인 말이 스스로를 충만하고 결정적이며 완벽한 지식으로 인식할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려고'(묵시 21,5 참조) 오시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을 기다릴 때에, 인간의 말은 자기 자신 안에 이미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4) 문학은 신앙 언어의 역동성을 다시 깨닫게 해주며 영적 식별의 힘을 키워줍니다.
시 읽기
나이 들어 더 이상 평론집과 소설들을 잘 읽지는 않습니다. 읽어야 할 세상의 다른 텍스트들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긴 호흡으로 문학 작품 읽어내기가 점점 버거워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습관적으로 시집은 사서 읽습니다. 건조한 논문을 쓰거나 신학 강의를 준비하는 일상 안에서 시 읽기는 일종의 해방구 같은 역할을 합니다.
최근 이원하 시인의 시집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문학동네시인선 249, 2026)를 읽었습니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통해 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첫 시집(<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을 읽고 느꼈던 감동이 컸기 때문에,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려 왔습니다. 한 시인의 시집들을 시간의 궤적에 따라 읽는 일은 사람과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확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시인의 사유와 감정과 정서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짜릿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문학 전문가가 아니어서 시집이 보여주는 문학적 성취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시집 속에서 시인이 어떤 문제들과 집요하게 씨름하고 있는지, 어떤 인식적 통찰과 성찰을 드러내는지, 어떤 감정의 굴곡과 정서적 반응을 보였는지, 어떤 전망과 의지적 태도와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훔쳐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은근한 기대를 품고 이원하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읽었습니다. 첫 느낌은 당혹감이었습니다. 자연을 매개로 감정과 정서와 상상의 역동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첫 시집의 그 빛나던 표정들과 서술들이 사라진 것 같았습니다.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어떤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고자 했는지, 시집이 그려내는 시인의 마음 풍경이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시집 뒤에 실린 해설과 시인의 미니 인터뷰를 읽어보고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어떤 주제를 말하고자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의 조부를 매개로 분단과 실향의 주제를 천착한 시집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안다고 해서 다 공감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첫 시집이 보여주었던, 젊은 시인이 가진 사랑의 감정과 정서의 발랄함에 공감하고 매료되기는 쉬웠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이 품고 있던 분단과 실향이라는 주제는 아무래도 오늘의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저에게 확 다가오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 (이원하, 문학동네, 2026)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작가라는 타자를 매개로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삶을 읽는 일입니다. 문학 작품을 통한 이해와 공감은 매개적 이해와 공감입니다. 이원하 시인의 첫 시집을 통해 젊은 여성의 정직한 인식과 감정과 정서의 역동을 엿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집은 시인이 할아버지를 매개로 분단과 실향의 현실과 실향민들과 탈북민들의 마음 풍경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에, 시인과 저 사이에 이중의 매개라기보다는 삼중의 매개가 존재합니다. 이해와 공감이 쉽게 발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시집이 겨냥하는 주제에 대한 친밀감이 부재하고 삼중의 매개로 인한 거리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번 시집이 살짝 낯설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시집이 지향하는 주제와 정서에는 계속 잘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일상의 장면과 정서적 풍경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나오는 시인 특유의 잠언적 표현들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시가 갖는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성취보다는 시의 말(표현)들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인간과 삶의 내밀한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생의 순간을 포착하고 감춰진 의도를 서술하는 시적 언어들을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밀려가는 삶 안에서 의지적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 수도자
어느 수녀회의 연피정을 동반하면서 이원하 시집을 읽어서인지, 시인이 그려내는 실향민의 마음 풍경과 수도자의 삶이 겹쳐 보였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가만히 끌려가는 삶이다// 그칠 줄 모르는 요일과/ 머물 줄 모르는 시간 사이에서/ 암이 생길 것 같은 속이다// ······ // 감정을 반값에 잘못 사왔다// 이번 생엔/ 좋은 계절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이 나를 오려내려 한다"(<세상이 나를 오려낸다>). 시집의 첫 번째로 실린 시의 서술이 연피정 동반의 시간 내내 마음에서 맴돌았습니다. 실향민의 정서를 서술한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의 풍경을 서술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특히 수도자들의 현실과 정서를 반영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와 영성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공동체적 삶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사도직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수도자의 삶을 선택했지만, 수도자의 자리와 역할 부여에 인색한 교회의 현실과 익숙한 관습과 규범의 울타리 속에서 새로움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수도자들의 모습은 시인이 그려내는, 분단과 실향의 아픔과 질곡 속에서 살아가는 실향민과 탈북자의 힘든 운명의 모습과 닮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희망을 챙겨주는 사람이 등 뒤에 없습니다/ 그늘을 등진 채/ 거울 앞에 섭니다// 평생 나만 바라봐 주는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거울 앞에서 그대라는 명칭을 얻습니다>). 주님을 믿고 수도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나 외에는 아무도 내 생을 바라봐 주지 않는 외로운 여정입니다. "꿈에선 꿈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지만/ 현실에선 지독한 현실을 깨달아도/ 도달될 곳이 없어서"(<서툰 칼질은 징검다리를 완성시킵니다>) 자주 서성거리며 살아갑니다. "유일한 휴양이/ 이탈뿐이라/ 두려움이 앞서는"(<내일의 나를 미리 구상하면 안 돼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후회는 늘/ 높고 선명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먼 곳은/ 하늘이 아니라/ 다음 생임을 깨닫습니다"(<과거는 쌀뜨물로 씻어도 씻기지 않습니다>). "올해가 얼른 가버리길 바라는데/ 구부러진 내일이/ 펴지지 않습니다"(<미소가 덧칠될수록 얼굴은 일그러집니다>).
지치고 고단한 삶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이 수도자입니다. 때때로 "인생의 반을 바치는데도 왜/ 창문에 낀 먼지 하나 살피면 안 되는 건가요"(<부화하지 않고, 않을 한마디>)라고 반문하는 삶이기도 하고, "울면서 기도하면 안 이루어지죠/ 울지 않고 빌어야/ 하늘에 잘 뜨니까요/ 하지만 어리숙한 나를 울리는 일들뿐입니다"(<또 말고 떠>)라고 슬픈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삶이지만, "개화 기간이 길수록/ 향이 진해진다고 믿습니다"(<한 칸 띄어쓰기 된 사이도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수도자의 삶은.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는다"(요한 16,7).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이원하의 시집을 읽는 동안 매일 미사에서 묵상했던 요한복음의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부재에 대한 고별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거듭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사람의 몸을 지닌 존재로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내적이며 영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지상에서 이별은 영적 만남을 통해 오히려 더욱 새로워진 관계로 나아간다는 진실입니다. 신앙의 삶, 수도의 삶은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옛 방식만을 집착하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별이 올 때 봄도 오는 겁니다."
정희완 신부 -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