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적으로 부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부활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부활은 신비의 절정이다. 이성과 삶의 영역에서 다 해명되지 않는다. 부활은 사유와 언어로 포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부활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부활의 실재(reality)가 무엇인지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진실을 우리는 믿는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부활 능력에 힘입어 부활할 것이라는 진실 또한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그 부활이 무엇인지, 그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부활을 믿고 신앙한다. 하지만 부활을 신앙하는 것과 부활에 대해 상상하는 일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신앙인은 모두 부활을 믿고 신앙하지만, 부활을 상상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실, 어떤 명제를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 명제의 구체적 내용을 상상하는 것은 다르다. 같은 명제를 수용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속내를 보면,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상상하고 이해한다. 명제적 일치는 가능해도 상상의 일치는 불가능하다.
성경이 전하는 부활 사건 - 부활의 역사성 문제
성경의 진술들 안에는 역사적 요소, 문학적 요소, 신학적 요소가 다 담겨 있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는 안다. 성경의 진술은 단순한 문학적 이야기도 아니고 순수한 역사적 기록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또한 성경의 진술이 순전한 신앙적 고백과 신학적 성찰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성경의 진술들은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은 아주 짧고 일관성을 갖지 않고 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은 어떤 논리적 전개의 형식을 찾기가 어렵고 진술의 일관성도 잘 확보되지 않는다. 성경의 부활 텍스트는 복음서의 빈 무덤 이야기와 부활 발현 이야기, 바오로 서간에서의 부활 선포로 구별된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신앙은 분명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부활한 예수님 체험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체험이 어떤 성격의 체험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또 그 부활 체험과 부활 신앙을 가능하게 한 사건을 역사적 맥락에서 정확히 묘사할 수도 없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이 발생했다고 믿고 신앙하지만, 과연 부활 사건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 안에서의 부활 체험 vs. 신앙 안에서의 부활 체험
부활 사건은 하느님의 영역이지만 부활 체험은 사람들의 영역이다. 초기 제자들의 부활 체험과 사도 바오로의 부활 체험과 이 시대 우리의 부활 체험은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구체적 시간과 공간 안에서 보고 만지고 들음으로써 체험했던, 즉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부활 체험은 초기 제자들만 가능했던 것일까. 바오로 사도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역사 안에서의 마지막 부활 발현이었던 것일까. 성경학자들이 추론하듯이, 사도 바오로의 부활 체험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 2년 정도 지난 뒤의 사건이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 이후 2년 동안 지상에서 활동하셨다는 뜻일까. 아니면 사도 바오로의 부활 체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갈라 1,12)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부활 체험의 내면화와 신학화가 이루어지는 현상일까. 부활 체험이 발현이라는 외적 사건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내면 안에서의 신앙적 인식 변환을 뜻한다는 것일까.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는가. 엠마오 이야기는 역사 안에서의 발현은 끝났지만,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은 계속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엠마오 이야기가 알려 주듯이, 이제는 발현이라는 직접적 체험도 아니고, 계시적 체험도 아니고, 오직 신앙 안에서의 성사적 체험만 가능한 것일까. 오늘의 부활 체험은 오직 말씀과 성사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부활 체험, 일종의 매개적 부활 체험일까. 초기의 부활 체험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인격을 만나는 사건이었다면, 오늘의 부활 체험은 말씀과 성사와 공동체와 기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신앙적이고 영적인 만남일까.
아마도 초기의 부활 체험과 오늘의 부활 체험은 형식과 양식은 다르지만 같은 부활 사건 또는 부활 실재를 향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제자들의 부활 체험, 사도 바오로의 부활 체험, 오늘의 부활 체험은 동일한 실재(부활하신 주님)를 서로 다른 층위에서 서로 다른 체험적 양식으로 만나는 것일까. 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역사 안에서 현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주님의 현존 방식이 달라지든 체험의 양식이 달라지든, 세 가지 체험 모두 수동성(먼저 다가오시는 분), 변환(삶의 근본적 재정향), 파견(공동체와 선교로의 열림)을 수반한다. 단지 역사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매개의 층위가 깊어지고, 그에 비례하여 신앙의 결단적 성격이 강화될 뿐이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인 라파엘로산치오가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 (사진 출처 = 공유마당)
부활한 몸 - 죽음 이후에도 나는 나일까
몸의 부활, 부활의 육체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부활 사건과 체험 속에서 왜 몸의 부활이 강조되는 것일까? 몸의 부활은 부활의 구체성과 역사성을 담보하는 핵심 요소이며, 부활 이전의 예수와 부활 이후의 예수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담보하는 요소이기 때문일까. 요한 복음 20장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토마스의 행동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활한 예수를 손으로 만지려는 토마스의 행위는 부활의 구체성과 역사성을 표현하는 행위이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건넨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발언은 부활의 몸이 단순한 육신의 몸을 넘어서 있다는 뜻일까.
몸의 부활이라는 문제는 몸과 정신(영혼)과 관계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또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 몸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난제를 낳는다. 우주 안에서의 우리 몸은 분자(molecule) 구조로 되어 있어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한다. 소년, 청년, 중년, 노년의 몸으로 변한다. 우리 몸의 정체성이 반드시 현재의 물리적 육체성으로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치한 생각이지만, 부활의 몸이 죽은 시점의 몸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그렇다면 부활한 몸은 부활 이전의 몸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부활한 몸에 대해서는 그저 신학적 상상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는가?
몸의 부활이 강조되는 배경 안에는 인간 정체성의 문제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에 대한 달라진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썩어 없어질 몸, 그래서 영혼만이 불멸하는 존재라고 믿었던 시대에 몸은 인간의 정체성 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구체적인 몸이 인간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담보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부활한 존재는 몸을 지녔다는 것, 그 부활한 존재는 죽음 이전의 존재와 연속성을 갖는다는 것,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몸의 부활, 부활한 몸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죽은 뒤에도 나는 나인가? 죽음 이후에도 ‘나’라는 정체성은 이어지는가? 이것을 담보하는 것이 영혼인가, 몸인가? 서양은 오랫동안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에 기대어 이 물음에 답해 왔다. 몸은 사라지지만 영혼은 불멸하며, 그 불멸하는 영혼 안에 나의 정체성이 보존된다는 것이다. 영혼은 고귀하고 몸은 그 영혼을 잠시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과 몸으로 나뉜 존재가 아니라, 몸과 영혼이 하나로 통합된 전인적 존재다. 인간은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몸으로 존재한다. 나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것은 영혼만이 아니다. 몸이 없으면 ‘나’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성경의 부활 신앙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말한다.
부활한 몸은 이전의 몸과 연결되지만, 이전의 몸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변형된 몸, 새로워진 몸, 영적인 몸이다. 존재 전체가 변형된다는 뜻이다. 죽기 전의 나와 연속성을 가지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그렇다면 그 변화된 존재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죽음 이후의 내가 죽음 이전의 물리적 외모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이 못생긴 내 모습으로 존재한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 나의 연속성은 물질적 연속성이 아니라 인격적 연속성, 관계적 연속성일 것이다. 죽음 이후의 내 모습은 변해 있지만, 지상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나도 그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승에서 맺은 사랑의 인연들이 저승에서도 이어지기를 나는 희망한다. 사랑했던 어머니를 저승에서 내가 알아보지 못하고,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플 것일까.
부활의 실재에 대한 상상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저 부활의 의미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일까. 아무튼 나는 부활을 사랑으로 상상한다. 부활의 실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부활이 사랑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승에서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활이고 저승에서도 사랑으로 존재하는 것이 부활이라고 상상한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믿고 희망한다. “태어난다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전과 다른 몸이 되어 이전과 다른 이름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하나의 몸으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이어서, 너는 보이지 않는 눈이 되어 그 모든 것을 한눈에 다 알아보았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이제니의 시,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에서)1)
1) 이제니 시집, <영원이 미래를 돌아본다>, 문학실험실, 2026, 23.
정희완 신부
안동교구 사제. 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을 전공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오래 강의했고, 지금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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