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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안동교구] 험준한 새재 아래 100년 신앙 지켜온 당포공소
  • 작성자 홍보전산
  • 작성일 2026-04-16 오후 1:40:08
  • 조   회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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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공소와 성모상. 1926년 설립된 당포공소는 올해 100년을 맞았다.


경상북도 문경은 여우목, 마원, 진안리성지가 조성돼 있을 만큼 일찍이 가톨릭 신앙이 전래된 곳이다. 대구대교구 제2 수호성인인 이윤일(요한)이 문경 여우목 교우촌 회장 출신이다. 진안리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이며, 마원은 복자 박상근(마티아)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경상도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한 것은 1790년대 후반이다. 1798년 홍주 출신 복자 황일광(시몬)이 아우와 함께 신앙생활을 실천하기 위해 경상도로 이주했다. 또 성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복자 김종한(안드레아)도 1798년께 경상도 안동 우련밭으로 이주했다. 더불어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에는 충청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경상도로 피난해 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가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충청도 단양이 아니라 경상도 밀양 단장으로 유배를 갔다고 볼 경우, 경상도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한 해는 10여 년 앞당겨진다. 또 집안 문중의 박해를 받아 비슷한 시기 경상도 상주로 이주한 서광수 가정에 의해 처음으로 경상도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는 주장도 있다.(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87쪽 참조) 안동교구는 안동교구사 자료 제4집 「교구 전사」에서 마백락 선생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김범우의 유배지에 관한 학술 논쟁은 어느 정도 정리돼 있는 만큼 한국 교회 통사 안에서 바로잡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3월 1일 자 1848호 ‘한국 교회 주역 청년들’<9> - 김범우 참조)설립 100주년 맞은 유서 깊은 공소

문경을 비롯한 경상도 북부 일대에 가톨릭 교우들이 살기 시작한 때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다.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진보·영양·안동 등지에서, 1827년 정해박해 때 상주와 순흥에서 교우들이 체포됐는데 이들 대부분이 신유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충청도 출신 교우들이었다. 따라서 경상도 북부 지역 가톨릭 신앙공동체는 충청도 신자들에 의해 형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경읍 당포리(唐浦里)는 신북면 화지리(花枝里)와 산문리(山門里)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 마을을 병합해 당포리라 했다. ‘꽃가지 마을’ 화지리는 변음되어 ‘고지골’ ‘고주골’로도 불렸다. 당포리는 1932년 문경면에 편입됐고, 1980년대 문경 일대 광산 경기가 호황일 때는 많은 주민이 살았으나 폐광 이후 외지로 많이 빠져나가 지금은 쇠락한 마을로 변해가고 있다.

당포는 산 좋고 물 좋은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해발 911m의 ‘성주봉’이 우뚝 솟아 있다.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이 바위산을 당포리 주민들은 ‘장군봉’이라 부른다. 또 당포리 앞으로 흐르는 신북천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을 만큼 물이 맑다.

안동교구 문경본당 당포공소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당포리 화계1길 59-2에 자리하고 있다.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유서 깊은 공소다.(당포공소 설립일에 대해 안동교구 공소 탐방 「틔움」에서는 1926년, 안동교구 홈페이지에서는 1956년 회장 임명부터, 안동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안동 가톨릭사학-공소 교회와 교구 사제단」에서는 1924년 이전으로 표기하고 있다. 기자는 현 공소 회장의 말을 인용해 설립연도를 1926년으로 한다)

1926년 경북 영천에 살던 박기일(가브리엘)을 비롯한 네 형제가 밀양 박씨 문중에서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고 박해를 해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당포로 이사와 가족끼리 공소 예절을 하며 산 것이 당포공소의 시작이었다. 이들 네 형제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전교해 세례받은 교우 가정이 20세대나 됐다고 한다. 이들은 대축일이면 걸어서 1시간이나 되는 공평성당(현 점촌동성당)이나 함창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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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입구에 꾸며진 사무공간. 교무금 봉투와 주보, 가톨릭평화신문 등 교우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정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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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공소 내부. 샌드위치 패널 양편에 넓은 창을 내어 채광이 잘되게 해 놓았다.





문경본당 설립 후 복음화 새바람

조선 왕조 치하 박해 시대 때나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조상을 소중히 여기던 가문들은 여전히 제사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했다. 가문과 국가 권력의 박해를 피해 마음 놓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교우들은 깊은 산 속 험하고 가파른 골짜기에 찾아들었다.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 해서 부른 ‘새재’, 곧 ‘조령’(鳥嶺)은 교우들이 숨어들기에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문경에 복음화의 새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58년 12월 7일 문경본당이 설립되면서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감목대리구 에르네스토 지베르츠(한국명 지인수)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가톨릭 신앙공동체 기틀을 다졌다. 그는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를 교우든 아니든 상관치 않고 공평하게 배분해 존경을 받았다. 그는 오토바이와 낡은 지프를 몰고 문경과 가은 지역을 누비며 선교했다. 1957년 그가 문경 일대를 사목하기 시작할 때 700명이던 교우 수가 4년 후에는 2250명으로 늘었다.

1969년 5월 안동교구 설정과 함께 문경본당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조동래(베드로) 신부는 지금의 당포공소 대지를 매입해 공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이듬해인 1970년 제6대 주임 문세화(Pierre Domon, 베드로) 신부가 1972년 공소 설립 46년 만에 당포공소 건물을 짓고 봉헌식을 했다. 교우들이 직접 지어 봉헌한 벽돌 슬래브 건물이었다. 당포공소는 1997년 지금의 조립식 건물로 재건축됐고, 2015년 제단을 새로 꾸미는 등 새 단장을 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창호 등을 새로 바꿔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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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나무 제대와 독서대, 십자가와 예수 성심상, 성모상으로 꾸며져 있다.


청아함 돋보이는 신앙 공동체

당포공소는 마을 어귀에서도 종탑이 보여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벽돌 담장을 따라 공소에 들어서면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소박한 당포공소를 만난다. 공소 바로 옆에는 성모상이 서 있다.

공소 내부는 제법 넓다. 양쪽 벽면에 두 개씩 큰 창을 내어놓았고, 창마다 예수님 생애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장식돼 있다. 회중석에는 긴 나무의자가 양편으로 6줄씩 놓여있다. 적색 부직포가 깔린 제단에는 나무 제대와 독서대, 십자가와 그 양 옆으로 예수 성심상, 성모상이 장식돼 있다.

당포공소는 화려함은 없으나 청아함은 가득하다. 100년간 이어온 은근한 신앙 전통이다. 이 전통이 청아함으로 드러나는 까닭은 이해를 넘어서는 깊은 사랑과 달관을 뛰어넘는 관상 체험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산 좋고 물 좋은 새재 아래 꽃가지 마을에서 무한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느님과 이루는 사랑의 합일에서 차분하고 조용하며 청아한 신앙 체험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새재를 넘어 문경에 정착한 모든 신앙 선조들과 그 후손인 당포공소 교우들에게 공소 설립 100년을 축하한다.

리길재 전문기자 teotokos@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26. 4.16] https://news.cpbc.co.kr/article/117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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