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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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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넉넉한 마음

 

언젠가 주일학교 여름 캠프가 있기 전날이었습니다. 봉사자 청년 두 명이 오후 늦게까지 성당에 앉아 열심히 캠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먹었냐?”고 물었더니 안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제관으로 불러 라면을 삶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들이 라면을 삶는 제 모습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물도 끓기 전에 스프부터 먼저 넣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라면을 끓일 때 찬물에 스프부터 넣어서 물하고 스프가 같이 끓도록 해 왔습니다. 청년들은 물이 끓으면 라면을 넣고 그리고 나서 스프는 맨 마지막에 넣어야 한다고 우겼습니다. 저도 지지 않았습니다. 물과 함께 스프가 충분히 팔팔 끓어야지 더 그윽한 라면 맛이 난다고 우겼습니다. 사실 라면을 먼저 넣든 스프를 먼저 넣든 뭐가 그리 대수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스프를 먼저 넣어야 더 깊은 라면 맛이 난다고 괜히 우기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스프를 먼저 넣어 삶은 라면이 맛있었던지, 그 청년들 라면 국물에 밥까지 다 말아 먹었습니다. 다음날 캠프 가기 전에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려고 아껴둔 밥이었는데.

우리 인간의 사고 체계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냐냐 주의입니다. 라면을 삶을 때 라면을 먼저 넣어야 하느냐?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런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라면을 먼저 넣어야 한다!’ 혹은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독단과 독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도 주의입니다. 라면을 삶을 때 라면을 먼저 넣을 수도 있고, 스프를 먼저 넣을 수도 있겠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질문 앞에서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겠지.’하면서 그 답을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아무런 해답도 찾지 못하는 회의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인간 사고의 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가 다 일정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 사물에 대해 판단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적절한 방식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엿볼 수 있는 하느님은 어쩌면 도도 주의에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분께서 냐냐 주의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으시지만, 적어도 수확 때까지도도 주의를 견지하고 계십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지만 그분께서는 가라지를 단번에 쳐 없애버리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냥 지켜봐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베어버리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빡거린다 하여 꺼버리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로부터 고집 세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좋은 의미의 고집이 아니라 말 그대로 똥고집을 이르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반성 많이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언쟁을 벌이고 또 본의 아니게 많은 분들께 상처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앞으로는 스프보다 라면을 먼저 넣고 끓이는 것도 연습해 봐야겠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넓은 마음으로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도 배워 봐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참으로 넉넉한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너무나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에게 성체의 선물을 건네러 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한 마음 가득 성체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망동 본당 우병현 마태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