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원 산책하기”
제가 살고 있는 농은수련원에는 참 넓은 운동장과 정원이 있습니다. 한 여름이 되면 끝도 없이 올라오는 잡초들 때문에 잠시 신경이 곤두서지만, 사시사철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요. 그 넓은 정원 중에서도 특별히 정이 가는 곳이 있습니다.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님과 아홉 분의 교구 신부님들께서 편히 누워 계시는 성직자 묘원입니다. 생각이 좀 시끄러울 때도,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씩씩거리고 땀 흘리며 잡초랑 씨름을 할 때도, 저녁노을이 그림같이 아름다울 때도 언제나 그 곳엔 특별한 편안함이 있습니다. 바로 “돌아서서 새로 시작하기”입니다.
언젠가 시내 서점에 나갔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한 권 사왔습니다. “혼자 사는 즐거움”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이 특별히 눈에 띈 것은 첫 번째 장의 제목 <묘원 산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용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오래된 묘지에 가야 한다. 묘지는 고요하고 잠잠하다. 파란만장한 삶이 끝난 후 얻어진 적막함은 우리에게 행복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극작가 손튼 와일더의 연극 「우리 읍내」를 보면 몹시도 가슴 저미는 장면이 묘지에서 펼쳐진다. 유령들이 얼마 전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젊은 여주인공 에밀리를 위로한다. 이미 떠난 이승에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에밀리는 살아생전 평범하고 ‘사소했던’ 어느 하루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마침내 소원을 이뤄 잠깐 이승으로 돌아간 에밀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에밀리는 벅차오르는 안타까움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녀는 애절하게 고백한다. ‘나는 살아 있을 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깨닫지 못했어. 아무도 그런 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지…. 이제 작별인사를 할께. 안녕, 세상아. 안녕, 길거리의 나무들….. 안녕, 아빠 엄마. 안녕, 재깍거리는 시계…. 가을 정원의 해바라기. 안녕, 맛있는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새로 다린 드레스와 뜨거운 목욕…. 잠을 자고 깨어나는 일. 아, 사람들이 이렇게 멋진 것들을 깨닫지 못하다니.’”
이번 주일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돌아섬’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제1독서) 복음에서 들은 두 아들의 비유 말씀 역시 ‘돌아섬’에 관한 것입니다.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처음엔 싫다고 대답했던 맏아들은 이내 생각을 바꾸고 돌아서서 일을 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했던 다른 아들은 반대로 일을 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항상 옳을 수만은 없는 존재이기에 자칫하면 잘못된 판단과 선택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항상 생각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돌아섬’은 지금의 상황과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가 무엇이든 - 내적인 것이든 외적인 것이든 -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 어떻게 뉘우침과 돌아섬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살아갑니다. 갖가지 불의와 부조리들을 당연한 것이라 외면하고 넘어가는가 하면 정말 감사하고 소중한 것들도 당연한 것이라고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연극 속의 주인공 에밀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렇게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얼마나 멋진 것이었는가를 죽고 나서야 알게 되고 안타까워 합니다. 오늘 복음의 맏아들도 일하러 가지 않겠다던 자기의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돌아서서 다시 생각해보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시고 우리들의 ‘주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제2독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고자 한다면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은총과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또 우리 인생이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에도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혹 우리 삶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돌아서서 하느님을 향해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노력합시다.
농은수련원 김종길 제오르지오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