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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안동교구] 농은 홍유한 탄생 300주년 심포지엄 영주서 열려
  • 작성자 홍보전산
  • 작성일 2026-06-08 오전 10:40:31
  • 조   회 49

안동교구·풍산홍씨대종회, ‘최초 신자’ 단정 넘어 제도 이전 신앙 실천 조명

한국천주교회가 ‘최초의 수덕자’로 기억해 온 농은 홍유한 선생을 다시 조명하는 탄생 300주년 심포지엄이 5월 30일 오후 1시 30분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발표자들은 홍유한의 수계생활과 영남 이주, 풍산홍씨 신앙 전승을 함께 아우르며, 그를 ‘최초 신자’로 단정하기보다 한국교회가 제도로 자리 잡기 전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복음적 삶을 실천한 인물로 살폈다.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br>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이 열렸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

영주서 열린 탄생 300주년 심포지엄

“복음적 삶의 증거자”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이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는 “농은 홍유한 선생이 한국천주교에 미친 영향”이었다.

행사는 천주교 안동교구와 풍산홍씨대종회가 주최하고, 안동교회사연구소, 우곡성지, 풍산홍씨천주교순교자현양회가 주관했다. 윤성규 신부(우곡성지 담당)의 시작기도 뒤 권혁주 주교(안동교구장)의 격려사, 홍광식 풍산홍씨대종회장의 기념사, 김기진 영주문화원장의 축사, 농은 홍유한 선생 후손 대표 홍기홍 8대 종손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주제발표에서는 홍석정 신부(의정부교구 직장경찰사목위원장)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생애'를 소개했다. 이어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한국천주교회 내 위상'을, 신대원 신부(안동교회사연구소장)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영남 이주와 남행공동체 구상'을 발표했다. 김성태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는 복자 홍낙민의 삶과 신앙 전승을 중심으로 풍산홍씨 순교자들의 삶을 다뤘다. 발표 뒤에는 원재연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교수, 김정숙 영남대 명예교수, 방상근 박사(역사학자)의 논평이 있었고, 이어 김수태 충남대 명예교수가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최초 신자’ 단정보다 ‘최초 수덕자’의 의미 검토

홍유한(1726-1785)은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최초의 수덕자’로 기억되어 온 인물이다. 수덕자는 기도와 절제, 애덕 실천을 통해 덕을 닦아 간 사람을 뜻한다. 홍유한의 삶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수계생활’은 천주교 가르침에서 익힌 계명과 규범을 삶 속에서 지키려 한 실천을 말한다.

권혁주 주교는 격려사에서 홍유한이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천주교 교리에 따라 수계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 역사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조한건 신부는 첫 번째 주제발표에서 홍유한을 둘러싼 교회 전승과 사료를 함께 검토했다. 조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의 전승 안에서 홍유한이 한문 서적과 자연적 이치로 하느님을 알고 공경하기 시작한 인물로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한국교회의 창립과 직접 관련되거나, 그를 천주교 신자로 확정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짚었다.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에서 조한건 신부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한국천주교회 내 위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br>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에서 조한건 신부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한국천주교회 내 위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

조 신부는 홍유한의 문집이나 관련 글에서 천주교 신앙을 직접 고백하거나 증언하는 1차 사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홍유한의 위상을 말하려면 김대건 신부, 다블뤼 주교, 샤를르 달레 신부가 남긴 기록과 교회 전승, 후대 풍산홍씨 신앙 전승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보았다.

김대건 신부의 기록은 홍유한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진리를 알아들어 “가톨릭 신자의 예에 따라” 하느님을 공경하기 시작했으며, 매월 7일을 특별히 지켰다고 전한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는 그가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세속 일을 제쳐 놓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으며, 금육일을 몰라 식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희생했다고 기록한다.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도 이러한 전승을 이어받아, 홍유한이 축일표와 기도서가 없는 상황에서도 7일마다 일을 쉬고 기도에 전념했다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발표자들은 그를 ‘최초 신자’로 단정하기보다,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자신이 이해한 방식으로 기도와 절제의 삶을 실천한 ‘최초 수덕자’로 조심스럽게 조명했다.

이에 대해 원재연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교수는 홍유한을 ‘최초 신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사료상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의 7일 주기 실천과 재계, 희생적 나눔을 단순한 유교적 수신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논평했다. 원 교수는 홍유한의 삶을 교회 공동체 이전의 개인적 수덕생활로 보되, 그 안에서 천주교적 실천의 가능성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보았다.

서울에서 예산으로, 다시 순흥으로

신대원 신부는 두 번째 주제발표에서 홍유한의 삶을 서울, 예산, 순흥으로 이어지는 이동의 흐름 안에서 살폈다.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에서 신대원 신부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영남 이주와 남행공동체 구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br>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에서 신대원 신부가 '농은 홍유한 선생의 영남 이주와 남행공동체 구상'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

홍유한은 1726년 서울에서 태어나 1760년 무렵 예산 여사울로 옮겼고, 1775년에는 경상도 순흥 구고리(현 경북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터전을 옮겼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시기를 순흥에서 보냈고, 현재 그의 묘소는 봉화 우곡성지에 있다.

신 신부는 마지막 순흥 이주를 단순한 은거가 아니라 ‘남행 구상’의 실행으로 보았다. 남행 구상은 홍유한 혼자만의 계획이라기보다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학자들과 함께 나눈 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신 신부는 순흥 이주를 학문 공동체를 옮기려는 계획에만 머물러 보지 않았다. 그는 홍유한의 남행을 서학에서 얻은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려는 수덕의 공동체 구상으로 읽었다. 책으로 배운 진리를 실제 삶의 방식으로 옮기려 한 시도였다는 것이다.

신 신부는 홍유한이 순흥에서 10여 년 동안 기도와 절제의 삶을 이어 갔고, 그의 남행이 권철신, 이기양, 홍낙민, 이존창 등 초기 서학 연구자들의 흐름과도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홍유한의 이주는 한국천주교 초기 신앙이 책의 연구에서 삶의 실천으로 옮겨 가는 한 장면으로 해석된다.

김정숙 영남대 명예교수는 신대원 신부의 발표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남행공동체’의 성격을 더 분명히 물을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남행이 학문공동체의 이동이었는지, 서학의 진리를 삶으로 옮기려 한 수덕공동체 구상이었는지를 구별해 살필 때 홍유한의 순흥 이주 의미도 더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홍유한의 가르침은 어떻게 내포 신앙공동체로 이어졌나

김성태 신부의 세 번째 주제발표는 홍유한의 삶이 후대 풍산홍씨 가문의 신앙 전승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복자 홍낙민의 삶을 통해 살폈다.

김성태 신부가 “풍산홍씨 복자 홍낙민의 삶과 신앙 전승”을 중심으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br>
5월 30일 경북 영주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농은 홍유한 선생 탄생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심포지엄에서 김성태 신부가 '풍산홍씨 복자 홍낙민의 삶과 신앙 전승'을 중심으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천주교 안동교구)

김 신부는 풍산홍씨 가문이 한국천주교 초기 역사에서 중요한 신앙 전승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그 가운데 홍낙민은 홍유한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조명됐다.

김 신부는 서울에 살던 홍유한이 1760년 또는 1761년 예산 두촌면 여사울로 이주했고, 홍낙민·홍낙교 형제도 1763년 같은 마을에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13세였던 홍낙민은 홍유한이 1775년 순흥으로 떠날 때까지 약 12년 동안 그의 가르침과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이 시기의 학문과 서학 접촉이 훗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설명됐다.

홍낙민의 신앙은 개인의 입교에 머물지 않았다. 김 신부는 한국천주교회 창설 직후 홍낙민과 이존창이 내포 지역 신앙공동체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존창이 살던 천안 여사울과 홍유한·홍낙민이 살던 예산 여사울은 인접한 지역이었고, 이존창은 홍낙민 형제와 함께 공부한 인물로 소개됐다.

홍낙민은 초기 교회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 신부는 홍낙민이 1786년 가성직제의 신부로 임명됐으며, 초기 교회의 주요 사안에 의견을 내고 의사 결정에도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가성직제는 성직자가 없던 초기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자체적으로 성사 집전을 시도했던 제도를 말한다. 이후 가성직제의 오류가 드러난 뒤에는 이승훈 등과 함께 합법적 성직자 영입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파견한 일이 주문모 신부 입국의 계기가 되었다고 정리했다.

김 신부는 홍낙민이 외적으로 배교한 기간에도 기도와 재계 실천을 그만두지 않았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으며, 모친상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 대목은 풍산홍씨 가문의 신앙 전승이 내포 지역 공동체 형성과 초기 교회 운영, 일상의 신앙 실천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방상근 박사는 홍낙민의 신앙 형성 배경에서 홍유한의 영향을 살피는 작업은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다만 홍낙민이 어떻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곧 입교 과정에 대한 설명과 관련 자료의 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논평했다.

제도 이전의 신앙 실천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번 심포지엄은 홍유한을 ‘최초’라는 이름으로만 확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최초 수덕자’라는 교회 전승을 사료와 연구 속에서 다시 살피며, 한국천주교회가 제도 이전의 신앙 실천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지를 묻는 자리였다.

홍유한의 삶을 둘러싼 핵심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세례를 받은 신자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의 글에서 천주교 신앙을 직접 고백한 자료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 다블뤼 주교, 달레 신부의 기록과 한국교회 전승 안에서 그는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기도와 절제의 삶을 살았던 인물로 기억되어 왔다.

따라서 이번 심포지엄의 의미는 ‘홍유한이 최초 신자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데만 있지 않다. 성직자도, 성당도, 교회 제도도 충분히 갖춰지기 전, 천주교 서적을 읽고 그 가르침을 삶의 방식으로 옮기려 한 유학자의 실천을 한국교회가 어떤 언어로 기억할 것인가. 그것이 이번 심포지엄이 남긴 더 깊은 질문이었다.

홍유한은 ‘최초 신자’라는 단정 안에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교회 제도가 자리 잡기 전 진리를 찾고, 책에서 만난 가르침을 기도와 절제의 삶으로 옮기려 한 인물로 남아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농은 홍유한 선생은 한국교회가 복음적 삶의 시작을 어디에서 식별해 왔는지 다시 묻게 하는 이름으로 남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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