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선택하십시오!
- 작은 것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 -
1.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2009년은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특별히 교구민 모두가 “기쁘고 떳떳하게” 사는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거룩한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올해 교구의 사목방향은 전년도에 이어 교구사명선언문의 내용에 따라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입니다. 생명의 문화 창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활기찬 한해가 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생명의 샘”이신 우리 하느님
2.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시편 42,3)이시며 그분께는 모든 생명이 거기서 비롯되는 “생명의 샘”(시편 36,10)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 마태 22,32; 루카 20,38)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모든 생명의 젖줄인 물 위에 당신의 기운을 흐르게 하시고(창세 1,2 참조)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당신의 생명으로 살게 하신 창조행위(창세 2,7 참조)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손길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라고 함께 고백하는 그 하느님이 바로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생명의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하느님의 “생명”(요한 11,26; 14,6 참조)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3.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샘”(시편 42,3)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생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기듯이 생명을 섬겨야 한다는 말도 가능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생명(zôe)'이라는 말이 복수가 아니라 항상 단수라는 사실도 생명이 하나의 원천 곧 생명의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는 이러한 진리를 증언하는 듯합니다. 아무리 미소한 생명이라도 모든 생명은 이렇게 하나인 생명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관계를 '유기적(有機的)'이라고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최근에 발표하신 당신의 두 번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에서, ‘생명’을 그 원천이신 하느님과 맺는 관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은 우리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간직하고 있거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입니다. 온전한 생명은 그 원천이신 분과 맺는 관계입니다. 죽지 않으시고 생명 그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분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27항)
인간 생명
4.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은 다른 살아있는 피조물들에게 주신 생명과는 전혀 다른 고결한 품위를 부여 받았습니다.'(생명의 복음, 34 참조) 인간은 특별히 ‘하느님을 닮은 모습’(창세 1,26.27 참조)으로 창조되었고, 또한 하느님 ‘생명의 숨’(창세 2,7)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인간의 이러한 위대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이단 반론, IV,20,7) 여기서 ‘살아있는 인간’이란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구체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자랑스럽습니까? 그러므로 인간 생명은 어느 누구도 임의로 앗아갈 수 없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시편 104,29 참조) 그리고 인간 생명을 경시하는 모든 풍조는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위배됩니다.
5. 교회는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범죄와 공격들을 분명하게 단죄하고 있습니다. “온갖 살인, 집단 학살, 낙태, 안락사, 고의적인 자살과 같이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 지체의 상해, 육체와 정신을 헤치는 고문, 심리적 억압과 같이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인간 이하의 생활 조건, 불법 감금, 추방, 노예화, 매매춘, 부녀자와 연소자의 인신매매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또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노동 조건;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입니다. 이는 인간 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입니다”(사목헌장, 27 ; 생명의 복음, 3 참조). 인간 생명을 위협하는 이러한 문화의 위기는 생명경시풍조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문화보다 죽음의 문화가 더 득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인간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방법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할 일이 더욱 분명하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이야기를 통해서 교회가 인간 생명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그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포도밭 주인이 관리자에게 명합니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20,8). 여기서 ‘맨 나중에 온 이들’은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일거리를 주지 않아서 살아가기가 막막한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같습니다. 이렇게 포도밭 주인은 살기가 절박한 처지에 있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생명의 서열’을 정하여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나누어 주라고 명합니다(20,8 참조). 일한 대가로 따지면 주인의 처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누구의 생명을 먼저 돌봐야 하는가 하는 차원에서 생각해본다면 주인의 처사가 오히려 고마울 뿐입니다. 죽어가는 생명, 약한 생명, 상처받은 생명부터 살리시는 방법이 인간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명을 살리는 방법은 이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인 생명’이 상처받거나 죽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꼴찌의 생명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함께해야 한다.’는 교회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있어서 인간의 수태 순간과 죽음의 순간에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윤리적 판단에 대해 교회가 그토록 엄중한 것은 약한 생명을 우선적으로 돌보라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원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생명이 연약한 상태에 놓여있는 병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 또한 같은 이치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 생명
7. 우리는 편의상 인간 생명 이외의 모든 생명을 ‘자연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 곧 자연 생명도 하느님의 구원 대상이 됩니다(로마 8,22-23 참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은 인간의 구원만을 말하지 않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함께 말합니다. ‘인간과 세상’의 구원이라는 표현이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의 생명 이해는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인위적인 자연의 생명 훼손과 환경 파괴로 이미 인간의 생명까지 위협받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는 우리의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8.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일구고, 돌보는 권한(창세 1,26,28; 2,15 참조)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이러한 통치권으로 창조주 하느님께 봉사하게 되고 더욱 보시기 좋은 세상, 곧 ‘새 창조’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권한은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유일무이한 특권입니다. 인간은 이를 더욱 잘 선용함으로써 하느님과 닮은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살리는 모든 일은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할 소명입니다. 인간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조화롭게 잘 돌봐야 하는 소명입니다. 한 생명체가 상처를 입으면 다른 생명체도 상처를 입게 마련이며 한 생명체의 보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가 희생과 극기와 절제를 감수해야 되는 것이 생명의 순환과정입니다. 이러한 생명 세계의 조화를 위해 인간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생명의 관리자로서 세상에 파견된 이유입니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의 희생과 파괴만 일삼는다면 이미 그는 생명의 관리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 선포
9. <우리는 이 터에서 …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교구사명선언문) 이는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올해 우리 교구의 사목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일상은 “생명”을 선택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신명 39,19-20 참조). “생명의 샘”이신 우리 하느님께 그 뿌리를 둔 인간 생명과 자연 생명, 곧 모든 생명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의 복음을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해야 합니다(마르 16,16 참조). “생명의 복음은 예수께서 전파하신 메시지의 핵심입니다”(생명의 복음, 1).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은 바로 생명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생명의 말씀’(1요한 1,1)이시기 때문입니다”(생명의 복음, 80).
10.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지역 교회의 핵인 본당을 “동네의 샘”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본당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센터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장시켜 알아듣고 싶습니다. “동네의 샘”인 본당이 “생명의 샘”이신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는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본당이 갈증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 찾아 드는 “동네의 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7 참조).
11.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삶의 편리함이라는 명분으로 알게 모르게 생명을 소외시키고 죽이기까지 했던 죽음의 문화를 멀리 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문화를 창출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꺼이 가난과 불편을 감수하는 선택도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 존엄성 회복운동, 인간 생명 불가침성 선포, 생명 환경 운동, 창조 보전 활동, 생명 농업 살리기 운동 등 갖가지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일에 모든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12. ‘기쁨 넘치는 생명의 길’(시편 16,11 참조)에 특별히 초대받으신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들의 발길에 친히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의 발길이 닿는 곳곳에 생명이 살아 약동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이 “생명의 샘”이신 우리 하느님을 함께 찬미하는 복된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합니다.
“정녕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당신 빛으로 저희는 빛을 봅니다.”(시편 36,10)
2008년 11월 30일 대림 제 1주일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