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본당 견진(26/05/31)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일체를 보면 사랑을 봅니다!
“삼위일체를 보면 사랑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사랑으로 풀어 설명합니다. 하느님이 삼위일체로 계시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요한 4,7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하나의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성부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고, 성자는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하나 되게 하는 사랑’입니다. “삼위일체를 보게 되면 사랑을 본다.”는 말의 의미도 그러한 뜻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이렇게 삼위일체 안에서 당신의 온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같은 사실을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 인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바로 여기 “우리”라는 표현 안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창조 의지가 이미 표현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관계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둘만의 사랑에 머물지 않고 제삼자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둘만의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지 않고 제삼자를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과 아내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자매들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사랑은 제삼자를 향해서 끊임없이 확장되어 나갑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랑이 인간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게서 배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지금도 우리 안에서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말한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하여도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아우구스티누노 성인은 이러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그 비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그 방법으로 그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인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여러분들 앞에 커다란 나무줄기가 보인다고 합시다. 기술이 좋은 훌륭한 조각가는 어떤 나무줄기 모습을 보고 미리 자기가 만들 작품을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그 나무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어떤 모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머릿속에 상상하고 있습니다. 조각가는 나무의 흉한 현재의 모양보다 앞으로 될 작품의 모습을 미리 생각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이 이와 같습니다. … 조각가가 숲에서 잘라낸 나무를 보듯이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신 이가 우리의 현재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재료의 상태를 보기보다 만들어질 그 작품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적대하고 격노하고 그들의 말로 우리에게 상처를 입게 하고, 그들의 비방으로 우리가 성을 내게 되고, 그들의 증오로 우리를 괴롭히는 우리 원수들을 이와 같이 대하도록 하십시오. … 그들의 현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요한 서간 강해, 강론 VIII, 10)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원수들을 사랑할 때 ‘그들의 현재를 보지 말고 그들의 미래, 곧 그들이 바뀌어 새사람이 된 상태를 미리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 방법을 원수 사랑하는 하나의 비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술가가 하나의 볼품없는 나무줄기나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미리 상상하고 생각하고 그 작품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가 정말로 볼품없는 사람 하나, 아무것도 아닌듯한 사람 하나, 차라리 버리고 싶은 사람 하나인 그러한 원수까지도 그를 사랑하는 데에 정성을 기울이고 마음을 다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사랑으로 그 사람은 “사람답게”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기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비법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결국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만이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들의 삼위일체 신앙고백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올바로 고백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며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우리를 박해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 3,16).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오늘도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