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톨릭교장회 연수 및 정기총회(26/05/29)
교황 레오 14세의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의 핵심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공지능(AI) 시대, 가톨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
교황 레오 14세께서는 당신의 첫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를 통해 성경의 두 가지 이미지로 우리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 건설'과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두 이미지는 우리가 기술을 통해 어떠한 미래를 건설해야 할지에 대한 극명한 대조와 윤리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첫 번째 이미지,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 건설(창세 11,1-9 참조)은 인간이 하느님을 배제한 채 자신의 힘과 안정을 보장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시작된 자기 긍정의 프로젝트입니다. 오만과 획일화가 부르는 비인간화의 위험이 함께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방식은 친교보다 획일화를 강요하여 다양성을 말살하며, 궁극적으로 거창한 효율성을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술의 맥락에서 이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벨 증후군(Babel syndrome)’을 상징합니다. 이는 약자를 희생시키는 이윤의 우상화, 차이를 무효화하는 획일화, 그리고 인간의 신비조차 디지털 데이터와 성과 지표로 환원해 버릴 수 있다는 기술적 통제의 오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배제하고 타인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결국 진정한 결속이 아닌 소외와 비인간화를 초래합니다.
두 번째 이미지, 느헤미야기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느헤 1-2장 참조)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인 해결책을 강요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소집하여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우려를 경청하며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단순히 무너진 돌을 다시 쌓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재건에 앞서 사람들의 관계를 먼저 회복하고 모든 사람의 공동 책임과 참여를 통해 화합의 언어를 되찾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이 ‘느헤미야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획일성이 아닌 다원성을 자원으로 삼고, 경청과 대화를 공동의 기반으로 삼아 정의와 형제애를 가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소수 권력이 기술을 독점하는 대신, 다양한 목소리와 비전이 함께 모여 안전하고 형제적인 공존의 공간을 함께 재건해 나가는 연대를 촉구합니다.
따라서 두 성경적 이미지가 우리에게 주는 궁극적인 교훈은, 기술 혁명 앞에서의 진정한 선택은 하늘을 지배하려는 권력을 앞세워 새로운 바벨탑을 쌓을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 공동선을 위해 형제적 공존의 성벽을 함께 세울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우리가 무너질 운명의 탑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인간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지키는 친교의 건설자가 되어 공동의 선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회칙 《고귀한 인류》(Magnifica Humanitas)에서, 레오 14세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이 기술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 핵심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십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기술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인간이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며, 기술은 결코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거나 대체할 수 없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 존엄성은 효율성이나 생산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를 지닙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엇을 성취하거나 생산하는지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생존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떠한 실패나 배제로도 깎일 수 없는 무한하고 존재론적인 존엄성을 지닙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능가하거나 이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둘째, 기술을 우선시할 경우 인간이 기계의 부품이나 데이터로 도구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효율성, 통제, 이윤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 속에서 인간은 시스템의 단순한 톱니바퀴나 최적화되어야 할 자원으로 취급받기 쉽습니다. 이 경우 인간은 관계와 친교를 나누는 인격체가 아니라 조작되거나 상업화되는 데이터 및 상품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셋째, 기술에는 인간과 같은 도덕적 양심과 공감 능력이 부재합니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계는 엄청난 계산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거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도덕적 양심이 없습니다. 또한, 기술 시스템은 결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으며 이를 설계한 자들의 편견이나 이념을 반영하여 취약계층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술은 무조건적인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항상 인간의 양심과 자유의지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넷째, 기술만능주의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를 초래합니다. 트랜스휴머니즘처럼 기술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사상은 자칫 진보라는 이름으로 힘없고 취약한 사람들의 희생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윤만을 좇는 디지털 경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착취하고, 인간을 추적 가능한 데이터 패키지나 소모품으로 다루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와 식민주의를 양산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혁신과 기술 발전의 약속이 진정으로 가치 있으려면 그 진보가 모든 남녀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을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경제와 기술의 질서가 이윤 창출이나 성능 향상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종속될 때에만, 기술은 인간을 지배하는 무기가 아니라 정의와 형제애를 증진하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교황 레오 14세께서 회칙 《고귀한 인류》를 통해 밝히고자 하시는 가톨릭 학교가 나아가야 교육 방향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향으로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방향은, 진리를 공동선으로 인식하는 '비판적 성찰 교육'입니다.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AI)은 가짜 뉴스와 정보 조작을 증폭시켜 진리와 허위의 경계를 흐립니다. 정보의 양이 진리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인간을 이롭게 하고 해롭게 하는지 복음의 기준으로 분별하는 ‘진리의 전당’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인공지능(AI) 활용법이 아니라,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고, 침묵과 사색, 텍스트 읽기를 통해 내면의 자유와 비판적 사고를 성숙시키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두 번째 방향은, 도구적 효율성을 뛰어넘는 ‘관계와 돌봄 교육’입니다. 트랜스휴마니즘이나 포스트휴마니즘 같은 조류는 인간의 한계(질병, 노화, 취약성)를 교정해야 할 오류로 보며 인간·기계 결합을 통한 기술적 구원을 꿈꿉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육은 인간의 유한성이야말로 타인과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는 은총의 통로임을 일깨워야 합니다. 인공지능(AI)이 공감과 돌봄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진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 학교는 디지털 기기에 중독되어 고립되어 가는 청소년들에게 기계가 줄 수 없는 ‘시간의 공유’,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실제적 돌봄’을 체험하게 하는 ‘신뢰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방향은, 인공지능(AI) 시대의 노동과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연대 교육’입니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의 흐름은 생산성을 높인다는 구실로 노동자들을 기계의 속도에 맞추게 하며 인간의 창의성을 억누르고, 대규모 실업과 고용 불안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육은 노동이 단순한 생계 수단이나 비용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고귀한 존엄성의 행위임을 확고히 가르쳐야 합니다. 미래 세대가 기술 혁신을 주도할 때, 효율성만이 아니라 ‘가장 취약한 이들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정의로운 경제관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공지능(AI)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시급한 의무는 ‘가장 인간다운 상태로 남아있는 것(Remaining profoundly human)’입니다. 이 일은 가톨릭 학교나 교사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거대 플랫폼 기업의 상업적 논리에 맞서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입법자, 교육 기관, 그리고 가정이 함께하는 '새로운 교육적 동맹'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살아갈 우리 청소년들이 기계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더 정의롭고 형제애 넘치는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복음의 지혜로 그들의 마음을 밝혀주시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먼저 구조적 투명성과 보조성의 원칙을 실현하며 사회의 표징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 결국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벨탑의 눈부신 파멸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잡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희망의 순례자가 되는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