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WYD 제1기 봉사자 수료 미사(26/04/12)
“길 Via”(ή όδός, the way)
- 안동교구 WYD 주제 및 영성 -
토마스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는 길이요”(ἐℽὠ είμι ή όδόσ, I am the way)라는 말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곧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방법’을 말씀하시지 않고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로 살아야 할지 서로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길’ 자체이신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나의 ‘길’, 내가 가야 할 ‘길’이 됩니다!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십니다.(루카 24,13-35)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에서 일어나는 여러 ‘세상살이’를 보기 위해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걷습니다. ‘길’에서 예수님과 두 제자가 만난 것은 특별한 상황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길에서 먼저 대화를 걸며 다가오신 분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사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루카 24,13.15.28 참조)은 구약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길을 걸어가시던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hodos)에서 일어나는 두 제자의 체험은 마치 ‘삶의 탈출기 사건’과 같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무지의 상태에서 깨달음으로, 닫힌 상태에서 열린 상태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탈출기 과정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두 제자의 만남은 우리가 참여하는 미사의 파견이 단순한 요식 행위가 아님을 마치 항변하는 듯 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여정은 항상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미래 교회, 청년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길 위의 순교자’,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만납니다!
‘길 위의 사제’, ‘길 위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36년, 불과 15세의 나이에 조선을 떠나 마카오까지 10,000리 길을 걸어 유학을 떠나셨고, 13년의 긴 기다림 끝에 1849년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오신 뒤에는 11년 6개월 동안 충청·전라·경상도를 누비며 127개 교우촌을 발로 걸어 다니셨고, 하루도 쉬지 않고 걸으신 그 발걸음은 매년 7,000리(약 2,800km)를 걸으셨는데, 이를 365일로 나누면 하루 평균 약 7.7km, 바쁜 사목 시즌에는 하루 80~100리(약 32~40km) 길을 걸으시며 밤새 고해성사를 주시고, 날이 새기 전에 또 다음 교우촌으로 떠나신 날이 허다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를 매년 3번 반 걸은 셈인데, 짚신 하나에 의지해 산길과 고갯길을 넘으셨을 그 모습은 마치 순교의 여정을 연상하게 합니다. 1861년 6월 15일, 40세의 이른 나이로 경북 문경 길 위에서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선종하십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지만, 박해 속에서 12년 가까이 온몸으로 신앙을 끝까지 증거하며 사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길 위의 순교자’, ‘땀의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깔레 신부님과 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신분과 국경을 초월한 ‘길 위에서’의 깊은 우정!
《…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인 이 산에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에 결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 가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겁니다. 신부님께서 이 험한 곳에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저는 참으로 기쁘게 신부님과 함께 죽을 겁니다.” 이상이 저희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자기희생의 다툼 중 이 헌신적인 교우[마티아]가 했던 말입니다. … 저는 저를 너무도 감동시킨 이 사람에게 명령이라는 방법을 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티아, 내 말대로 할 것을 명하겠네. 자네가 가져온 마른 과일 절반을 챙기고 나머지 절반을 내게 주게. 그리고 자네는 신부인 내 말을 따르게.” 이 말에 그는 저를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고, 저는 고함을 쳤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저 또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희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 복자 박상근 마티아는 우리 안동교구 제2 주보로 우리가 함께 본받아야 할 신앙의 아름다운 증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닫힌 문’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그고 문을 닫아걸고 있었는데(요한 20,19.26) 그들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인사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닫힌 문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두려움도 닫힌 문으로 들어와 평화를 비는 그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몹시 아름다운 부활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무서워서 철갑에 몸을 숨깁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고 우리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자물쇠와 빗장이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단단히 벽을 쌓아둔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로 들어와 그들의 공동체 생활을 변화시키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안셀름 그륀 수사의 묵상)
우리 모두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앙의 아름다운 동반자’가 됩시다!
<한쪽 다리가 짧아서 불편한 신부가 건강한 신랑과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주례 앞에 서 있습니다. 신랑이 한쪽 발을 신부의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넣고는 신부의 짧은 다리 왼쪽 발을 자신의 발등으로 떠받치고 있습니다. 신랑은 중심을 잡으려고 신부보다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 살겠다고 굳게 약속하는 신랑 신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신랑의 친구가 신랑 신부의 방안에서 조그마한 액자 속에 끼워진 분홍색 쪽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신랑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이철환, 「연탄길」, 222-224 참조)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던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며(요한 13,1), 제자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고 부르셨으며(요한 215,14.15), 그들과 함께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