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르실료 월례미사(25/12/15)
송현동 성당 20:00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 회복
오늘 복음(마태 21,23-37)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부하며 곤궁에 빠뜨리려 시비를 건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한 가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1,24-25)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곤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요.”(21,25-26)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라고 답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올바른 대답을 회피하며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을 거부하며, 결국 예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 다시 말해서 “관계의 회심”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2026년 안동교구 사목 교서의 내용과 연결시켜 “관계의 회심”을 통한 “올바른 관계” 회복이 어떠한 삶인지 그 의미를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사목 교서의 제목은 ’관계의 회심으로 새로워지는 교회‘라는 부제가 붙은 “함께 걸으며 복음을 살아갑시다.”입니다.
2026년 안동교구 사목교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0.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며, 보살피지 못하고, 함께 걸어가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면 과감히 회개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 특별사목교서 제11항) 2026년 우리 교구는 바로 이러한 가르침에 응답하며 복음적 관계의 회복, 곧 관계의 회심으로 새로워지는 교회가 되고자 합니다.
관계의 회심이란
11. ‘관계의 회심’은 하느님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삶의 모든 관계가 복음 안에서 다시 세워지는 변화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그 모범입니다.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길에서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하고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상처 입히던 이들의 고통이 곧 주님의 아픔임을 깨닫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열리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이 은총의 만남은 바오로가 사람을 보는 눈과 교회를 향한 마음 전체를 바꾸어, 그를 박해자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바오로의 회심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질 때, 이웃과 공동체와의 관계 역시 새로워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이며, 그 은총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방식으로 서로를 만나고,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관계의 방식
12.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신 방식은 우리에게 복음적 관계의 기준을 제시하며, 그것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다가감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먼저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죄의 어두움 속에서도 아담을 부르시고(창세 3,9),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요한 1,14). 시노드 최종문서 50항도 “관계를 돌보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성령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다가가는 사랑은 관계의 첫걸음이며, 교회 역시 이 하느님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경청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탈출 2,24), 예수님께서는 “경청하시지 않거나 대화를 시작하시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냥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51항). 그분은 만나는 이들의 필요와 믿음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웃의 말뿐 아니라, 그 마음의 울림에 귀 기울일 때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방식에 동참하게 됩니다. 경청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고 공감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돌봄입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신명 1,31) 당신 백성을 이끄시고, “독수리 날개에 태워”(탈출 19,4) 데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고 하시며 돌봄이란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돌봄은 시혜를 넘어선 함께 짊어지는 사랑이며, 이웃의 상처와 짐을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닮는 교회 ― 사목의 근본적 변화
13. 교회가 하느님을 닮을 때, 사목의 방향도 근본적으로 새로워집니다. 이 변화는 거대한 개혁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만남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는 일상적 회심입니다. 사목은 더 이상 ‘관리의 구조’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셨듯이, 사목도 함께 걷는 동반의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단순히 행사를 조직하는 공간이 아니라, 만남과 친교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프로그램보다 사람이 우선되고, 일정보다 관계가 먼저 세워질 때, 그 안에서 복음은 자연스럽게 살아납니다. 그리고 완벽한 계획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한 번 더 인사하고, 한 번 더 찾아가며, 한 번 더 위로하는 그 순간, 복음은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계의 회심의 실제이며, 교회를 새롭게 하는 가장 깊은 사목적 변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