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CPE(임상사목교육)협회 창립미사(25/12/13)
교회는 야전병원이다
먼저 가톨릭 CPE(임상사목교육) 협회 출범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미국에서 시작된(1925년 6월 20일) 전문적인 영적돌봄 교육을 제공하는 CPE(Clinical Pastoral Education)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했고, 한국 CPE 협회(KACPE, 협회장 정무근 다미안 신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난 4월 2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를 제목으로 CPE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국 세미나를 개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CPE 협회는 이미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등 4대 종교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함께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오늘 독립적으로 따로 가톨릭 CPE 협회를 창립하여 가톨릭교회 안에서의 활동을 더욱 확장시키고 활성화한다고 하니 축하드리면서, 개인적으로도 시작하는 데 함께하여 제가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2014년 8월 19일 한 기자가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회를 ‘야전병원(野戰病院)’에 비유하시면서 ‘심하게 다친 사람에게는 콜레스테롤이 높다거나 당뇨가 있는지를 묻기 전에 먼저 그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상처받은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지금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아마 교회 내에서의 CPE 협회 활동에 대한 기대도 많이 하셨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교회가 병원’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초대교회 때부터 사용해 오던 전통적인 것으로, 예수님께서도 복음 말씀에서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12)고 하시면서 영적인 돌봄(“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태 12,13)에 대해 이미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표현은 예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화가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루카 10,29-37)와 연결시키면서, 교회는 자비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고 교회의 사목자는 무엇보다도 자비의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시면서, 교회 직무에서 ‘영적 돌봄’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황영화 마티아 신부님도 오늘 미사 복음 말씀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이야기(루카 10,29-37)를 선택해주셨는데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을 ‘영적 돌봄의 표상’으로 삼고자 하신 것으로 여겨져서 저도 오늘의 강론 말씀을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비롯한 바티칸 교황청 식구들의 연례 피정 중 아침 묵상에서 피정 지도 강론을 맡으신 신부님(Ermes Ronchi)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말씀의 의미를 함께 마음에 새겨보고 싶습니다.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란 고통 앞에서 멈춰 서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이 말씀은 ‘고통 앞에서는 항상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시는’ 그리스도의 연민, 곧 자비를 상기하는 말씀이었는데 이어지는 신부님의 말씀을 더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슬림과 유대인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종교인과 다른 점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느냐 멈추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자기 발걸음을 멈춥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루카 10,30-35 참조)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행한 10개의 동사는 마치 새로운 십계명처럼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야지 적대자나 무심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행한 10개의 동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보았다,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멈춰 서서 다가갔다, 부었다, 싸맸다, 태웠다, 데리고 갔다, 돌보아 주었다, 지불했다, 충분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우리 그리스도인이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행동을 세 단어(동사)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 세 단어는 ‘보다(see), 멈추다(stop), 만지다(touch)’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맞아 상처 입은 사람을 대하는 행동에서 바로 이 세 가지 동작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같은 방향으로 가던 어떤 사제나 레위인이 행동한 것처럼, 상처받고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을 일부러 외면하거나 지나쳐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돌보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상처받은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보고(see), 멈추고(stop), 만집니다(touch).>
교부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과 동일한 인물로 보고 묵상했습니다. 복음 말씀을 예수님과 같은 시각으로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직접 손으로 만지시며 고쳐 주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사람들까지도 손으로 만지며 고쳐 주시고 다시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일들이 법을 어기면서도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오늘 이러한 일들을 하도록 부름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상처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찾아내고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곳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비란 고통 앞에서 멈춰 서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내 주변 가까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see), 멈춰 서고(stop), 만지며(touch)>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근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명이며 본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자기 발걸음을 멈춥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참 이웃이 되어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렇게 하라고 율법 학자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