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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장 말씀

교구장말씀프라도 종신 서원 미사(2025.08.11)
  • 작성자 홍보전산
  • 작성일 2025-09-15 오전 11:02:33
  • 조   회 46

 

나누는 가난 살기!”

 

 

저는 프라도 회헌 49항에 나오는 프라도인들의 가난을 선택하는 삶에 대한 다음 말씀을 나누는 가난 살기라는 말로 함께 풀어 보고 그 의미를 함께 마음에 새겨 보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가난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기를 원하셨다. 가난은 그분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특징이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이 세상의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파견된 사람들로서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난을 선택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 위해서 교회가 자발적인 가난의 표지를 보여주어야 한다.(프라도 회헌 49)

 

예수님께서 물질적인 가난이 선()이라고 말씀하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탐욕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의 독선을 질책하신 적은 있습니다.(마태 19,16-26: 루카 12,16-21; 16,19-31; 19,1-10 참조)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마태 6,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재산이나 돈의 부정한 축재나 축적은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고, 하느님을 멀리하게 되면 가난한 자들을 불의한 방법으로 착취하게 되어 결국 재물, 곧 맘몬(mammon)을 숭배하는 죄에까지 떨어지게 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또한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말씀 전에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참 제자 되는 조건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아무리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하더라도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지 않았다면 그 한 가지가 예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는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불의하게 재산을 부정 축재한 부자들에게는 이 한 가지 실천이 바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성서 말씀은 부자나 가난한 이나 모두 하느님에게는 구원의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마주치는 가난한 이와 학대하는 사람 그 두 사람 눈에 빛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29,13)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세리 자케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구원에 대한 응답으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겠다고 약속하는데(루카 19,1-12 참조), 우리는 여기서 일련의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풍요로움이 함께 어우러져 이 땅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러한 부자와 가난한 이가 함께 이루는 구원의 공동체에 적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그들과 자리를 함께하신 이유도 가난한 이들의 구원이 바로 예수님과 그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표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1코린 7,30-31)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마음, 물질에 대한 초연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증언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게 나누는 가난을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그리스도교적인 나눔이라고 성경의 전통은 강조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본래 그리스도교적인 가난은 게으름뱅이의 가난이 아니며, 오히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참조)는 말을 상기하게 하는 적극적인 의미의 가난을 일깨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 제도적인 모순에서 가진 자들의 탐욕 결과로 어쩔 수 없이 버림받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며 돌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나누는 가난을 통해 탐욕의 빈공간을 끊임없이 채워나가는 것이 바로 교회가 끊임없이 강조해 온 가난의 올바른 실천 방향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삶의 그리스도교적인 첫째 의미는 베푸는 사랑보다 한 차원 더 높은 함께 나누는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가난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성서의 전통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실 자체를 의로운 일로 여긴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난한 이들이 많은 사회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난을 선택하며 사는 삶의 출발점을 나누는 가난 살기실천 운동에서 찾고 싶습니다![어른 김장하 선생(1927-2022)에게 익명의 프라도인이라는 별명을 드리고 싶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든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든 저는 가난을 항상 하나의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특별히 나누는 가난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 더 가까이, 예수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행복을 이미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프라도 회원들은 누구보다도 축복받은 사람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 특별히 이러한 프라도인의 삶을 다짐하며 종신토록 살겠다고 청원하며 봉헌하는 두 사제, 남상우 토마스 모어 신부님과 윤성규 바오로 신부님에게 축하 말씀과 함께 감사 말씀도 함께 드리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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