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이처럼
시골 어느 농부의 곳간에 들쥐네 식구들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주인 농부가 이사를 가고 말았다. 곳간도 텅 비고 말았다. 겨울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작은 쥐들은 콩이랑 열매, 밀이랑 짚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두들 밤낮없이 일했다. 하지만 들쥐 식구들 중에 ‘잠잠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잠잠이, 너는 왜 일 안하니?” 그들이 물었다. “나도 일하고 있어.” 잠잠이가 대답했다.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빛을 모으고 있는 중이란다.”
언젠가는, 풀밭을 노려보며 앉아 있는 잠잠이에게 작은 쥐들이 물었다. “대체 뭘 하는 거니?” “빛깔을 모으는 거야.” 잠잠이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겨울은 잿빛이니까.” 또 때로는, 잠잠이가 반쯤 눈 감은 듯이 보였다. “너 졸고 있구나.” 그들은 나무라듯이 캐물었다. 그러자 잠잠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 말을 모으고 있는 거야. 길고 긴 겨울철 얘깃거리가 없어지는 날을 위해….”
겨울이 닥쳤다. 그리고 첫눈이 내렸다. 작은 들쥐 다섯 마리는 곳간 안 그들의 집으로 꼭꼭 숨었다. 처음 얼마 동안에는 먹을 것이 흔했다. 쥐들은 어리석은 여우나 바보 고양이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다가 양식은 차츰 동이 났다. 열매와 딸기가 바닥이 나고 짚마저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콩은 오직 기억에만 남아있게 되었다. 집안은 썰렁하고, 이제 수다를 떠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그들은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햇빛과 빛깔을 모은다던 잠잠이의 대답이었다. “네가 모은다던 건 어떻게 되었니?” 그들은 비로소 궁금해 하였다. “눈 감으라구.” 커다란 돌멩이 위로 올라서며 잠잠이는 말했다. “자, 너희들에게 햇빛을 보여주마. 얼마나 눈부신 햇살인지 알겠니?” 잠잠이가 해님 이야기를 꺼내자 작은 쥐들 네 마리는 언뜻 따스함을 느꼈다. 잠잠이가 요술을 부린 것 같았다.
“빛깔도 모았었잖아.” 그들은 따졌다. “다 눈 감아.” 잠잠이가 말했다. 새파란 넝쿨꽃이며 빨간 양귀비, 노란 밀 이삭과 짙푸른 딸기 잎, 이런 얘기가 시작되자 그들은 일찍이 마음에 그려져 있던 그 빛깔들을 아주 뚜렷이 볼 수가 있었다. “그럼 말은?” 잠잠이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무대에서나 선 이처럼 멋진 시를 읊었다. 잠잠이가 다 읊고 나자 모두들 박수를 쳤다. “야, 너는 시인이구나!” 잠잠이는 얼굴을 붉히며 절을 했다. 그리고 수줍은 듯이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들쥐 식구들은 육신의 양식을 얻기 위해 노동하는 인간의 측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잠잠이는 영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측면을 의미한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한 삶의 모습이다. 문제는 잠잠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잠잠이의 가족들에게 잠잠이가 없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불안해하고 방황하는 것은 육신의 양식을 버는 것에는 약삭빠르게 움직이지만 영적인 양식을 쌓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잠잠이는 별로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게으름뱅이로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들이 필요한 것을 모으고 있었다. 아마 다른 가족들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잠잠이가 모아 둔 것은 중요한 순간에 큰 힘을 발휘한다. 잠잠이는 영적인 양식을 모으는데 관심이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주일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이 차려진 식탁에 찾아오는 신자들을 통해 잠잠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잠잠이가 하는 노력을 가벼이 생각하거나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의 눈에는 쓸데없는 행동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의 의미이다.
예천 본당 김기환 요셉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