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함께 하시는 하느님
형제자매 여러분, 한가위 명절은 잘 지내셨습니까? 모두들 보고 싶었던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고 뜻 깊은 명절을 지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번 추석은 우리에게 피를 흘려 신앙의 새벽을 열어주신 124위 순교 복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욱 뜻 깊은 명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지난여름, 우리는 아주 특별한 여름을 보냈습니다. 교황님께서 남겨주신 많은 선물들 덕분입니다. 교황님께서 보여주신 모습 하나하나, 가르침 하나하나가 뜨거운 여름 날씨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었지요. 하지만 어느 듯 시원해진 가을 날씨처럼 교황님께서 전해주셨던 그 뜨거운 울림마저 이내 식어버린 건 아닌지 아쉬움이 듭니다.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떠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많은 곳에서 애써 그분의 메시지를 외면하려는 듯한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 던져주신 많은 가르침과 초대 중에 한 가지는 ‘함께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방문 첫날, 청와대에서는 ‘무관심의 세계화’를 극복할 ‘연대의 세계화’를 강조하셨습니다.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물질주의, 이기주의 등으로 인한 무관심 증상, 특히 도움과 보호를 받아야 할 이들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이제는 전 세계가 함께해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4박5일 동안 ‘함께 한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한국을 떠나시는 날, 마지막으로 명동성당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시기 전에 우리나라의 다양한 종교지도자들을 만나셔서도 그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삶은 곧 길입니다. 그 길은 참 넓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길을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우리는 세상 구원을 위해 높이 세워진 십자가와 그 위에 메달리신 예수님에게서 ‘함께 한다’라는 것의 의미를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한다’라는 것은 한 사람이 넘어지면 누군가가 대신 일어서는 것입니다. 축구장에서 한 선수가 넘어지면 다른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뛰어 그 쓰러진 선수의 역할까지 잘 해 주는 것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경기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가정이든 직장이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모든 공동체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함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피하고 싶었던 잔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를 받아 들이셨습니다. 또 그분은 죄로 쓰러진 당신 백성과 함께 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높이 일어서셨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고 또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의지가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드높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쓰러진 모든 것을 일으켜 되살리고 세상과 하느님이 만나는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첫 나무 때문에 쓰러졌던 세상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고,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함께하길 요구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세상과 함께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쓰러지지 말아야 할 것들은 쓰러지지 않도록, 죽지 말아야 할 것은 죽지 않도록 보살펴주고 지켜줄 것을 요구합니다. 혹 내 안에 쓰러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은 없는지, 또 우리 주위에 일으켜 주고 살려내야 할 것들은 없는지 잘 살펴봅시다. 조금만 사랑해야 할 것을 많이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많이 사랑해야 할 것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봅시다. 그리고 사랑해야하고 살려주고 지켜내야 할 것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것들과 함께하도록 합시다. 각자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교황님의 이 말씀이 큰 격려와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강론 중에서,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 2014. 8. 18)
농은수련원 김종길 제오르지오 신부
